[미디어스=고브릭의 실눈뜨기] 최소 100만 명. 2차 세계대전 독-소전에 참전한 러시아 여성의 수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누적 참전인원이 38만명 가량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하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200여 명 이상의 참전 여군을 인터뷰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를 1985년에 발표하기까지 소련에서 여군의 참전은 영광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지 못했다. 무엇이 100만 명 이상의 여군들이 입을 막아버린 걸까. 예카테리나 니키티치나 산니코바 중사의 사연을 잠깐 살펴보자.

“우리 지휘관이 제대를 했어. 나를 찾아왔더라고. 그래서 그 사람과 결혼했지. 호적등록소에 가서 혼인신고만 했어. 그게 전부였지. 결혼식은 생략했고. 1년 후에 남편은 다른 여자한테 가버렸어. 우리 공장의 식당책임자 여자한테. 남편이 떠나면서 그러더군. 그 여자한테서는 향수 냄새가 나지만 나한테는 군화와 발싸개 냄새가 난다고. 그래서 이렇게 혼자 살아. 이 세상 천지에 나 혼자야.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책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성을 밝히기 거부한 저격수 클라브디야 스-바는 이렇게 말한다.

“딸은 정신병원에 있어...거기서 40년째야. 퇴직하고서는 날마다 따랑이한테 다니고 있어. 다 내 죄야…(중략) 남편에 대한 원망은 없어. 오래전에 용서했거든. 딸아이를 낳고 누워있는데...남편이 우리 모녀를 보더니...잠깐 있다 가버렸어. ‘정상인 여자라면 과연 전쟁터에 나갈 수 있을까? 총 쏘기를 배우고? 그래서 당신이 정상아를 낳을 수 없는 거다’라고 나를 비난하며 가버렸지. 나는 남편을 위해서 기도해… 어쩌면 남편 말이 맞는지도 모르잖아? 그런 생각이 들어...다 내 죄라고…”

그래도 여권이 강하다는 공산국가 소련에서도 20세기를 사는 여성이 ‘미혼 혹은 이혼’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평탄한 사회생활을 이어가기는 전쟁만큼 혹은 그보다 혹독했다. 남성군인도 받기 힘든 무공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어도 말이다. 덧붙이자면 2차 세계대전에 영국은 22만 5천 명, 미국국은 45~50만 명, 독일군 50만 명의 여성이 참전했다. 하지만 자유주의에서든 공산주의에서든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전쟁에서만 여자의 얼굴을 찾아보기 어려울까.

여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은 여자들

남사친끼리 재미 삼아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냐’고 묻는다. 세계적인 사업가, 재벌 2세, 영화배우, 록스타 등의 평범한 대답이 돌아온다. 드물지만 절세미녀도 있다. 이유는 남성의 떠받듦을 즐겨보고 싶단다. 여사친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져본다. 직업군은 비슷하지만 성별만은 다르다. 남자를 고르는 경우가 많다. 성공한 사업자라도 남자. 재벌 2세라도 아들. 여성을 선택하는 아주 드문 경우는 오로지 절세미녀뿐이다.

타고난 재능에 가까운 절세미녀를 빼고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존경과 동경의 의미가 포함된 직업의 기본값이 남자라는 뜻과 가까울 것이다. 직업을 떠나 단순히 ‘남녀 중 어떤 성별로 다시 태어날래‘라는 질문을 던져도 여성을 고르는 경우는 드물다. 여성으로 겪어야 하는 신체적 고통과 사회의 차별적 시선이 고달픈 탓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조건들이 현재와 같다면 무조건 남자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속칭 N번방 사건으로 불리는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사건’까지 갈 것도 없다. 한 달에 일주일씩 원치 않는 감정변화를 동반한 신체적 고통을 사비로 해결하고 싶지 않다.

몇몇 남자들은 말한다. 데이트, 결혼 비용은 우리가 다 부담하지 않느냐고. 순진한 남자 뜯어먹고 사는 꽃뱀들이 얼마나 많냐고. 순진한 여자들 등쳐먹던 제비들이 기자들에 의해 사회문제로 부각된 게 1960년대다. 애초에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없는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은 건 우리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이다. 굳건해 보이던 사회구조가 붕괴해 하필이면 아들 세대가 피해를 보는 게 맞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가 따질 사람은 누구인가. 구조의 균열에서 잠깐 이득을 보는 소수의 이기적인 여자인가. 아니면 이런 사회구조 안에서 유구한 시간동안 혜택을 누려온 아버지들인가.

여장을 하면 남자도 고통 받는다

영화 <투씨>

1982년 개봉한 영화 <투씨>는 우연한 계기로 여장남자가 된 마이클(더스틴 호프만)이 겪는 사건들을 통해 가부장제 아래에서 숨 막히는 여성들의 고통을 전하고 있다. ‘코미디’라는 장르가 말하듯 많은 측면을 유머에 기대고는 있지만 결코 의미들이 가볍지는 않다. 숨 쉴 때마다 외모평가에 시달리고 자기주장을 말했을 뿐인데 ‘기쎈 여자’ 취급 당하기. 관심도 없는 돌싱남에게 원치 않는 고백을 연이어 받지만 ‘안전이별’을 위해 매너를 지켜가며 거절해야 하는 에피소드 등은 차라리 우스운 축에 속한다.

<투씨>를 감상한 뒤에는 한 문장만 더 기억하려 노력해보자. 영국의 평론가 주디스 윌리엄슨의 말이다. 그는 겨우 며칠 동안 사회적 타자의 입장에 처해보고 그들의 곤경을 완벽히 이해하고 동조하는 선언하는 ‘투씨 신드롬’을 혹평했다. 귀동냥과 영화 한 편으로 사회적 타자들이 겪었을 지난한 고통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말이다. 동의한다. <투씨>는 가부장제에서 누려왔던 특혜를 잊지 않으려는 경계의 영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는 영화지만 현실은 여전히 스크린 밖에 있다.

역지사지라고 사람은 똑같은 처지에 처해야만 깨달음을 얻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일부러 이런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미러링이다. 미러링이 옳지 않은 전술이라는 의견도 많다. 반감만 부추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미러링이 반감을 부추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반감을 미러링을 통해 드러낸 것뿐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대우 받을 수 있는 미국(!)의 백인(!) 남성(!) 배우인 1937년생 더스틴 호프만이 <투씨>를 회고하며 남긴 메시지가 40년이 가까이 지나도록 한국사회에 도달하지 못한 건 아직도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많은 탓이리라. 한국사회는 아직 한국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멋진 여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장한 내 모습은 만약 파티에서 만났다면 말을 걸고 싶지 않을 정도였어요. 왜냐하면 여장한 내 모습이 데이트를 신청할 만큼 육체적으로 아름답지 않았거든요...그래서 크게 울었죠. 그리고는 아내에게 '나는 이 영화를 꼭 하고 싶어. 내가 만난 여성 가운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매력적이었는데도 나는 그들의 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어. 나도 외모 지상주의에 세뇌됐다는 것을 알게 됐어'라고 말했어요...코미디 영화 투씨는 나에게는 결코 코미디 영화가 아니었어요."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