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국·내외 혼란을 유발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이 종식되면서 논란 촉발의 주체였던 국내 보수정치권과 언론은 '유체이탈'식 화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북한체제의 폐쇄성이 확인된 만큼 이를 북한 리스크에 대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질 뿐, 사과는 찾아볼 수 없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일 평안남도 순천 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 20일 만에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조선중앙TV 등 북한 매체들이 2일 보도한 영상과 사진에서 김 위원장은 걸어서 단상에 올라 준공식 테이프를 자르고, 공장 시찰을 돌고, 담배를 피웠다. 지난달 21일 미 CNN 보도로 중태설부터 사망설까지 나돌았던 김 위원장 건강이상설은 일거에 불식됐다.

건강이상설을 확대재생산해 국내 혼란을 증폭시킨 핵심 주체는 보수 정치권과 언론이었다. 미래통합당 태영호, 미래한국당 지성호 등 탈북민 출신 두 당선인은 김 위원장 중태설, 사망설을 "확인했다" 등의 표현으로 사실상 단정했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신변과 동선 등은 북한 내에서도 최고 수준의 기밀로 취급되지만, 이들은 익명의 대북 소식통에 기대 확인 불가능한 정보를 사실로 주장했다. 김 위원장 건강이상설이 불식되자 이들은 김 위원장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었던 것인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가며 책임회피로 일관하고 있다.

당내에서도 두 당선인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고 있지만 통합당은 2일 김 위원장 건강이상설 관련 논평을 내어 "그동안 국내외에서 제기된 다양한 분석과 추측, 그리고 증시하락 등 경제에 미친 영향은 우리가 얼마나 북한리스크에 취약한지를 방증했다"고 관전자의 태도를 취했다. 통합당은 "정부는 김 위원장과 관련된 일련의 과정들을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정부와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다잡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며, 반복되는 북한리스크에 대한 대비책 마련에도 나서야 할 것"이라고 오히려 정부를 향해 당부를 했다.

지난 10여일 간 김 위원장 건강이상설을 적극 보도한 보수언론 역시 통합당과 같은 태도를 보이고 있다.

중앙일보는 4일 사설 <김정은 잠적 사태 20일의 교훈>에서 "김 위원장 잠적 소동이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사실이 있다. 북한이란 체제 자체가 갖는 불투명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변수가 아닌 상수란 점"이라며 "핵 단추를 가진 김 위원장의 동향이 20여 일 동안 '깜깜이' 상태에 빠지는 일들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안보에 가장 큰 리스크"라고 했다.

이어 중앙일보는 "지난 20여 일간의 잠적 소동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다. 주가가 요동치고 안보 불안심리가 퍼지는 등의 비용도 치렀다"며 "정부와 안보 당국, 북한 관련 연구자나 전문가 그룹에서 국민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이번 사태로 되새겨야 할 교훈이 적지 않다는 얘기"라고 덧붙였다. '인포데믹'(Infordemic, 정보전염병)을 초래한 언론은 교훈을 되새겨야 할 주체에서 빠졌다.

중앙일보는 "앞으로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른바 대북 소식통보다는 한국 정부 당국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언론이 확인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의 발언에 대해 "정부가 '자신을 갖고' 북한에 특히 동향이 없다고 거듭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시중의 의혹이 왜 점점 증폭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부도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맞받아쳤다. 중앙일보는 "평소 대북 정책이나 정보에 관한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라며 언론의 책임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 사설 <김정은 잠행이 보여준 체제 불투명성… 그런 金에 좌우되는 남북관계>에서 "이번 김정은 잠적 논란은 핵무장한 북한의 내부 움직임에 대한 국제사회의 정보력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확인시켜 줬다"고 했다. 한국정부 등이 확보하고 있는 북한정보의 경우 그 정보가 공개되는 것만으로 정보당국의 정보능력 상실 우려와 외교관계에 미칠 영향 등이 커 신중을 기해야 한다.

조선일보는 비무장지대 내 한국군 감시초소(GP) 총격 사태를 김 위원장 건강이상설과 연결시키며 프레임을 전환하는 태도를 보였다. 조선·중앙일보 등은 김 위원장 행보와 GP 총격 사태가 북한의 '잠적-등장-도발' 패턴으로 보고 '더 큰 도발'에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9·19 군사합의가 깨진 것은 사실이지만 국방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등은 이번 사태를 '우발적 사고'로 보고 있다. 북한측의 해명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조선일보는 사설 <北 총탄이 우리 GP 날아왔는데 '오발 가능성' 감싸는 軍>에서 "김정은의 생환을 확인하자마자 정권 주변에선 대북 협력 사업 재개를 거론하고 있다"며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조급하게 서두르는가. 우리 사병들이 근무하는 GP를 향해 날아든 북의 총탄에 대한 분명한 잘잘못부터 따져야 할 일 아닌가"라고 강조했다.

조선일보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김정은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 청와대와 여당은 '특이사항 없다'던 자신들의 판단이 맞았다며 반색한다"면서 "함부로 추측을 내놓는 일은 신중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는 해도 김정은이 김일성 생일 행사에도 불참하는 등 20일 동안 모습을 감춘 건 분명히 이례적이다. 이런 수수깨끼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김정은의 무사 여부를 알아맞히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라고 썼다.

반면 한겨레,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의 언론에서는 '인포데믹'을 불러일으킨 언론의 자성을 촉구하는 비판이 이어졌다.

한국일보는 기사 <정보 사대주의에 휘둘린 '김정은 인포데믹' 열흘>에서 CNN 등 해외 유력언론 보도 이후 김 위원장 건강이상설에 대한 무분별한 인용보도가 이뤄져 인포데믹 사태를 키웠다고 비판했다.

한겨레는 기사 <언론들 '김정은 위중' 무책임 보도… 탈북 정치인도 혼란 키워>에서 "그동안 이른바 '대북 소식통'이란 익명의 정보원을 인용해 보도되곤 했던 대북 정보의 신뢰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며 "외국 언론, 국내 보수 언론과 정치인, 탈북 인사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다채널 증폭기' 구실을 한 것"이라고 총평했다. 이 기사에서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폐쇄적인 북한 내부 정보의 경우 확인이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 정치적 목적으로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유통했다는 의혹이 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인포데믹 폐해' 여실히 보여준 '김정은 변고설'>에서 "인포데믹을 초래한 주범은 언론과 일부 정치인"이라며 "국내외 언론 대부분이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추측성 보도를 이어갔다. 국내 매체들이 외신의 '권위'를 빌려 익명의 소식통 말에 근거한 보도를 받아쓰는 오랜 관행도 재연됐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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