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코로나19에 대한 피해를 여러 대책으로 메꾼다고 하는데, 늘 사각지대가 문제다. 예를 들어 위기를 넘기기 위해 무엇보다도 고용유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부가 고용보험료 지원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 대책은 애초에 고용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은 비정규직, 특수고용, 자영업자 등에는 별 소용이 없다. 코로나19 사태는 이런 식으로 체제가 손을 뻗고 싶어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문제를 드러낸다.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 등 고위급 인사들이 ‘전국민고용보험’을 말하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물론 보수세력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보수언론은 전국민고용보험에 토지공개념과 개헌론까지 엮어 정권의 일방통행 신호를 경계한다. ‘사회주의’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미래통합당은 지난 1일 개헌론에 대해 “총선에 승리했으니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를 만들어보겠다는 신호탄”이라고 했고 동아일보 4일자 지면에는 토지공개념과 이익공유제 개념을 두고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개념을 개정헌법에 박으려는 것”이라고 평가하는 칼럼이 실렸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꼭 불순한 어떤 시도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그런 문제를 떠나서, 이런 현안에 대한 사회주의라는 평가는 과연 정당할까? 토지공개념은 이미 노태우 정부가 도입을 추진한 바 있다. 당시 조순 경제부총리는 이 문제로 여당과 대립하다 사표를 냈다. 우여곡절 끝에 도입된 토지공개념 3법은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았지만, 당시 결정이 법 취지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이익공유제 역시 이명박 정권이 이미 꺼내든 바 있는 개념이다. 당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이익공유제가 사회주의 용어인지, 자본주의 용어인지, 공산주의 용어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파장이 일었다. 이런 아이디어의 기본 취지는 정운찬 당시 총리의 ‘동반성장’으로 이어졌다.

즉 토지공개념과 이익공유제는 보수 정권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는 정책 중 하나인 것이다. 개별 정책은 괜찮지만 개헌을 함께 말하면 사회주의가 되는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물론 정권과 여당이 ‘겸손’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밀어 붙이기보다는 야당을 설득하고 협력을 구하는 일이 충분히 이뤄져야 한다.

전국민고용보험과 같은 문제에 있어선 여야뿐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지금도 임의가입할 수 있는 자영업자나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고용보험가입률이 낮은 이유는 보험료 부담 때문이다. 이들에게 고용보험 가입을 설득하면서 보험료 일부를 정부가 부담하고 이를 위한 재원대책을 마련하는 식의 대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보다 우려되는 것은 전국민고용보험제의 배경이 되는 현실 인식이다. 코로나19 이후의 고용 상황은 항상 불안정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전망이 기정사실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국민고용보험의 주요 수혜자가 될 자영업자의 상당수가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예비-노동자(?)들에 가깝다는 사실까지 더해서 보면 앞으로 안정적 일자리란 더 이상은 없을 것 같다.

이런 전망은 코로나19 이전에 이미 저성장 시대의 고용 위기라는 형태로 회자된 바 있다. 주류 사회가 논하는 대안은 ‘유연안정성 모델’이다. 고용을 유연화 해 자본의 선택지를 늘려주는 대신 국가가 제공하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이러한 체제 유지를 위한 부담에 국민이 합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에서 이런 체제가 유지된 배경에는 강력하게 조직된 노조의 힘이 있었다. 유연안정성 모델의 핵심은 사회적 합의에 대한 신뢰이다. 자본과 정부라는 강자가 언제든 합의 내용을 뒤집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는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거다. 신뢰를 강화하기 위해선 정권의 선의에만 기대는 게 아니라 약자들이 합의를 강제할 수 있도록 수단을 갖출 수 있게 해야 한다.

전국민고용보험제 논의가 유연안정성 모델까지 이어질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럴 의도라면 노조 조직률 상향을 용이하게 하는 조건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 ILO 핵심협약 비준 같은 문제는 기본 중의 기본인데, 이 정권에선 아직까지도 충분히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디지털 바이오 플랫폼 뉴딜 등을 추진한다는데, 이것도 이미 위기 전에 ‘4차산업혁명’이란 포장지를 뒤집어 쓰고 등장했던 주장이다. 이 결론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타다 드라이버 문제와 플랫폼 노동자들의 현실을 통해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다시 깨닫는 것은 이 정권이 위기를 근거로 추진하는 여러 대책들이 사회주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글로벌 자본주의라는 표준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근 신문지상에 ‘재난자본주의’란 개념이 회자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데나 사회주의를 갖다 붙이는 비뚤어진 논의 지형을 바로잡을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수정치가 사회주의니 좌파니 할 게 아니라 합리적 근거를 갖춰 정책적 반론을 펴는 진지한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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