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최근 ‘세계 속의 한국’을 드높인 분야는 엔터테인먼트였다. 음악은 케이팝, 더 정확히는 방탄소년단이 있고, 영화 산업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3관왕을 차지했다. 방송 분야에서도 드라마 품질이 높아졌고 해외에 수출되는 경우가 흔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현상이 서구 국가들과 어깨를 겨룰 만큼 발전한 한국 국력의 징표라고 말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화 산업의 세계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건 산업의 수준이 향상된 면이 있다는 뜻이다. 문화 산업에 쓰이는 인적 자본, 물질적 자본 역시 나라 전체의 그것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최근 문화 산업이 이룬 세계화는 국력의 신장을 반영하는 부분은 있고, 국제 사회에서 국가 인지도를 넓히는 효과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문화 산업은 국가 산업의 일각이다. 한 나라의 사회 인프라, 경제력을 곧 대표하지는 못한다. 한국 문화 산업의 세계화를 한국의 국력에 겹쳐놓고 의미를 부여한다면 실제보다 국력을 과대평가하는 착시가 생긴다. 나아가 행간의 바탕을 조금만 더듬어 보면 기대와는 다른 낯익은 현실이 튀어나온다.

문화 콘텐츠는 무수한 이들의 협업으로 완성된다. 많은 이들이 그 과정의 부속품으로 소모되어왔다. 케이팝의 경우, 미성년자 연습생들이 트레이닝 시스템에 장기간 부속되며 제도적인 사회화를 밟지 못하는 현실이 지적되어왔다. 아이돌로 데뷔한 후에도 수면 시간이 보장되지 못하는 과중한 스케줄이 일반적이다. 영화, 방송 제작현장에서도 스태프들의 과중한 노동 시간, 부족한 임금, 안전장치의 부재가 오랫동안 지적되었다. 상대적으로 산업의 규모가 작은 케이팝 기획사의 경우, 매니지먼트 스태프들이 박봉과 과로를 버텨내고 있지만 그다지 공론화되지도 못했다. 만성이 된 영화 상영관 독과점 및 영화 산업 수직계열화, 끝없이 불거지는 음원 차트 공정성 문제를 떠올려도, 개별 문화 콘텐츠의 해외 실적이 곧 국내 문화 산업의 합리성을 반영하지는 못한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소감 전하는 CJ그룹 이미경 부회장 [EPA=연합뉴스]

<기생충>은 이런 점에서 문화 산업 세계화의 역설을 보여준다. <기생충>은 칸 영화제, 아카데미 영화제 수상과 함께,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준수했다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다. 이건 오랜 시간 개진된 산업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돼 이미 마련된 시스템에, 봉준호 감독이 <옥자>를 통해 ‘선진화된’ 해외 제작 시스템에 몸담은 경험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기생충>을 통해 제작 현장의 노동자 처우가 다시금 공론화되었고, 처우 개선이 더디던 방송 제작 현장까지 공론화되었다. 예를 들어 <기생충> 제작사 CJ E&M이 제작한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는, <기생충>이 개봉하던 시기에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았다는 스태프들의 폭로가 터져 논란을 빚었다. 아이러니는 무엇인가. 제작환경에 대한 사회적 환기가, 그 환경에서 배출돼 해외에서 전례 없는 성취를 이루며 산업의 아웃풋을 갱신한 작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기생충>은 한국 문화 산업의 발전을 세계에 입증한 작품인 것만이 아니라, 한국이 낳은 작품이 인정받는 ‘세계화’를 통해 발전이 지체된 국내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 계기였다.

생각하면 이건 문화 산업에 한정된 광경이 아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산업화·근대화를 거치며 대체로 이런 종류의 메커니즘으로 발전한 사회다. 사회 기층 구성원들의 인력을 ‘갈아 넣어’ 그들이 소속된 기업, 혹은 산업의 성장을 지원했고, 산업화의 후발 주자, 크지 않은 내수 시장을 가진 국가로서 해외 진출을 목표로 달려왔다. 가장 명확한 성공의 척도는 사회의 평균을 뚫고 나가 세계에 인정받는 국위 선양이었고, 그를 통해 국가의 아웃풋, 시장의 ‘파이’를 확장하는 것이 사회가 작동한 표준적 논리였다. ‘국가 대표’를 선발하는 데 국력을 투입하고 그들이 이룬 성과를 통해 국력을 재생산한 것이다. 예를 들어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에 많은 자금이 동원된 CJ E&M의 로비가 있었다는 건 공공연한 뉴스다. 그 ‘국가대표’가 경제 분야에선 대기업이고, 비인기 종목의 엘리트 선수들이고, 방탄소년단이며 봉준호인 것이다. 그 배후에는 상생이 이뤄지지 않는 불공정한 생태계와 혹사에 시달리는 구성원들이 있다.

17일 오후 대구시 중구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에서 한 의료진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들이 입원한 병동으로 근무를 들어가며 동료들에게 'OK' 사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은 코로나19를 다른 국가들에 비해 잘 방어하며 해외 정부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요즘 한국인들의 자부심을 이루는 ‘국위 선양’은 다름 아닌 방역이다. 이런 성과를 이룬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한국 국민은 국가의 이름으로 성과를 냈을 때 내 일처럼 기뻐해 왔고, 국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 희생하고 헌신해왔다. IMF가 왔을 때는 금 모으기 운동이 벌어졌고, 많은 해고자가 구조조정을 통해 거리에 나앉았다. 코로나19 방역에서는 일선 의료진의 헌신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소명 의식에 감사하는 마음뿐이지만, 인력을 저가에 동원하고 어떤 공적 책임이 지워지면 개인이 맡은 일을 몸이 삭을 때까지 하게 만드는 사회적 압력이 작용한 점은 없을지 모르겠다. 과중한 노동 시간, 야근 문화, 일신의 안위에 대해 조직을 우위에 두는 관습은 한국 사회의 일상을 구성해왔다. 실제로 4월 중순에는 대구에 의료 지원을 나간 의료인들 임금이 체불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고, ‘돈만 보고 여기 왔냐’는 말을 들은 의료인도 있었다고 한다. 중환자실 간호사 처우가 나빠 이직률이 높고 숙련된 인력을 보유하기 힘든 현실도 거론되었다.

지금까지 서술한 특성이 ‘국력’을 이루는 것도 사실일 것 같다. 국가를 위해 기층의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에 집단의 아웃풋을 내는 면에서 효율성은 있다. 코로나19 방역에서는 국력을 집결하는 방식으로 닦여 있던 사회의 메커니즘이 유사시에 유리하게 작용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헌신, 나아가 희생으로 도출되는 성과는 안정적으로 지속되기 힘들다. 전염병의 방파제 역할을 잘해주는 국가에서 살고 있어 안도감이 든다. 하지만, <기생충>이 문화 산업 제작환경을 돌아보게 해 준 것처럼, 한국의 방역 역량이 어디에서 왔는지 돌아보고, 혹시 인습적 관행이 섞여 있다면 혁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방역 선진국의 자부심 속에 낡은 가치가 ‘글로벌 경쟁력’의 위상을 얻어 정상적 가치로 고착될 수도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사회를 위해서도, 또 다른 바이러스가 엄습할지 모를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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