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새 진보정당 건설 연석회의 최종합의' 기자회견에서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가 합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 연합뉴스
민주노동당이 6월 18일부터 19일 이틀에 걸쳐 열린 정책당대회에서 '진보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연석회의' 최종합의한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진보진영 지지층의 기대감이 한층 높아진 것 같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간의 통합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양당이 힘을 합쳐 진보정치블럭을 튼튼하게 구성하고 2012년 정권교체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바람을 충족시켜주어야 한다고 믿는 입장에서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진보진영의 대통합을 현실화 시켜내야 하는 중대한 책임을 지고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4월 재보선 이전 까지만 해도 이러한 책임을 가진 당사자로서 민주노동당의 태도는 상당히 전향적인 것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2008년 분당의 이유가 되었던 일방적 패권주의를 반성하고 북한에 대한 비판도 수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들이 공식적, 비공식적 경로를 통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진보신당의 입장에서는 분당의 명분으로 작용했던 소위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에 대한 비판이 받아들여진다면 민주노동당과 다시 당을 합치는 문제에 대해 누구도 반대할 만한 명분이 없게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4월 재보선 이후 국민참여당의 진로 문제가 대두되자 민주노동당의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이정희 대표는 끊임없이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염두에 둔 듯한 행보를 이어갔고 5월 말에 있었던 소위 연석회의에서 유의미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할 것처럼 보이자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결렬선언문을 써서 회람을 했다는 보도까지 나오는 상황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연석회의와 관련한 최종합의안을 당대회에서 의결하였다는 것은 민주노동당이 그간의 오해를 불식시키고 진보신당과의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방향으로 중심을 잡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의결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반전이 숨어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진보신당 강상구 대변인의 주장이다. 강상구 대변인은 진보신당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최종합의문과 함께 의결된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건설 방침'의 내용은 사실상 최종합의문의 정치적 위상을 격하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최종합의문을 통해 새로운 진보정당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사실상의 '협상 2라운드'를 열어두는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진보신당이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국민참여당과의 통합 문제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 당 대회의 또 다른 중요한 결정은 당 강령의 개정이다. 그간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하는 것을 주요한 목표로 했던 당 강령의 내용을 '진보적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개정한 것이다.

언뜻 듣기에는 한 줌도 안 되는 대한민국 운동권들이 그들만의 고루한 언어습관을 벗고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기에 다른 정치적 맥락이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로 이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국민참여당 등의 범민주당 세력과 당을 함께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행보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당보다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당에 사람들이 합류하는 것을 덜 꺼려하리라는 점은 매우 분명하다.

그런데 절차와 시기에 대해 한 번 생각을 해보자. 만일 일각의 주장대로 민주노동당이 국민참여당 까지의 통합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굳이 지금 당 강령을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어차피 통합의 과정에서 새로운 강령과 당헌, 당규를 마련해야 할 터이다. 이 과정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든 보수적 민주주의든 합의를 하면 그만인 것 아닌가? 이들이 바라는 대로 국민참여당이 통합에 함께하게 되면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강령을 관철하는 것이 더욱 더 쉬워질 것 아닌가? 여기에 대해서 민주노동당 인사들은 '일종의 기준안을 확정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건 그렇게 눙칠 일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이 결정한 것은 분명히 당 강령의 개정이다. 대의원 2/3 이상이 찬성 표결을 했다. 만일 진보대통합이 안된다고 해도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지향은 '진보적 민주주의'로 확정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정이 지금 중요했을까?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두 번째 맥락이다. 사실 민주노동당의 강령을 '진보적 민주주의'로 바꾸기 위한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3년에, 아직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하나이던 시절 지금은 민주노동당의 주류가 된 소위 '자주파'가 모 대중조직의 조직적 입당 시기에 ‘진보적 민주주의’로의 당 강령 개정을 시도한 일이 있다. 이것은 지금은 민주노동당에 남아있는 자주파와 지금은 진보신당으로 뛰쳐나간 평등파의 진검승부였다. 결국 정치적으로 승리한 것은 평등파였지만 이 사건은 이후 분당을 불러올 정도의 맹렬한 정파 갈등의 시초가 된 사건 중의 하나로 평가받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민주노동당 주류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선호하는 것은 단지 2012년 때문만이 아닐 것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 있다. 보다 적나라한 맥락은 과거 운동권의 NL/PD 논쟁과 관련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논쟁은 스탈린주의가 낳은 단계적 혁명론인 ‘NLPDR론’에 따라 혁명을 해야 한다고 믿은 운동권의 두 정파가 끝없이 쓸모없는 말싸움을 한 것인데, 혁명에 1, 2, 3단계가 있고 지금이 1단계를 해야 할 때라면 2단계를 말하는 것은 일종의 ‘좌편향’이라는 것이 이 논쟁의 핵심이었다. 즉,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사회주의를 말하고 있는데, 한반도에는 아직 사회주의의 전 단계인 일반민주주의의 확립이 정착되지 않았으므로 민주노동당의 강령이 사회주의를 말하는 것은 좌편향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강령의 주요 내용이 ‘진보적 민주주의’로 교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주장을 이들은 계속해서 해왔던 것이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이들의 이러한 결정들은 원래 민주노동당의 당원이었던 진보신당의 많은 당원들에게 해묵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결정에 대한 실체적 진실이 어떻든 상처투성이가 되어 민주노동당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에게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너희가 있을 때 우리가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것을 너희가 돌아오기 전에 끝마칠 것이다’가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민주당이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에 진정성 있는 구애를 보낸다면서 ‘당내 선거는 오로지 오프라인 투표로만 한다’는 당규를 의결하는 것이나 똑같다.

이판 사판 공사판이라고, 어차피 이렇게 된 판에 사회주의라는 문구가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을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비참한 기분으로 사실상의 ‘복당’을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상대를 이렇게 짓밟아 놓고 하나의 당으로 새로 태어나면 그 당이 잘될지도 의문이다. 아니, 애초에 짓밟는 것 말고 진보진영 통합의 의지 자체는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지금 당장이야 진보대통합의 당사자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치적 상황을 만드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사실상 진보진영 내에 ‘정치’가 작동하는 것이 시기상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치세력에게 국민들은 진보정당에게 정말로 필요한 진심어린 지지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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