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가 귀환하고 있다. 옛 것, 옛 인물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복고열풍'이라는 매체들의 진단까지 나오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 아직 열풍이라고 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복고적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흐름의 시초로 <슈퍼스타K>를 꼽을 수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참가자들에게 제시된 미션곡 중엔 80~90년대 명곡들이 많았다. 시청자는 <슈퍼스타K>를 보며 옛 노래들이 단순히 흘러간 유행가 수준이 아니라, 이 시대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재발견했다.

그 흐름은 <놀러와> 세시봉 특집에서 정점에 달했다. 그리고 다시 <위대한 탄생>과 <나는 가수다>로 이어지고 있다.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가히 20세기 명곡의 향연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 프로그램들을 통해 원곡까지 뜨고 있다. 조용필의 '위대함'이 젊은층에게 새삼 인식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예능에서도 20세기가 활약한다. <무릎팍 도사>는 이장희, 윤복희, 김완선을 차례로 불렀다. <놀러와>에선 이선희가, <승승장구>에선 남진이 새롭게 조명되기도 했다. 추억을 찾는 '중년판 1박2일'로 알려진 <낭만을 부탁해>와 아이돌이 과거의 명곡들을 부른다는 <불후의 명곡2>도 새롭게 시작됐다.

영화계에선 <위험한 상견례>의 깜짝 흥행이 복고의 시작을 알렸다. 1980년대 말을 배경으로 촌스러운 청청패션과 원색셔츠의 풍경이 그려진 영화였다. 그리고 이어진 <써니>의 대박이 바로 '복고열풍'이란 진단이 나오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써니>는 대단히 세심하게 과거를 재현했다.

SBS 라디오는 올 봄에 구창모, 변진섭, 이성미, 장두석, 김기덕 등 왕년의 스타들을 DJ로 기용하기도 했다. 패션계에선 '땡땡이' 무늬와 비비드 컬러의 인기가 되살아나고 복고샌들이 나타난다고 한다. 공연계에선 80~90년대 히트곡들로 이뤄진 <광화문 연가>나 <젊음의 행진>이 인기를 끌고 있다.

휴대폰이나 노트북까지 순식간에 과거의 유물로 만들어버릴 듯한 스마트폰, 타블렛PC의 시대. 트위터와 얼리어답터가 득세하는 상황에서 왜 20세기인 걸까? 기본적으로는 30대 이후의 세대들이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소비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실질적인 구매력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기성세대에게 물질적 자원이 풍부하다는 조건은 언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왜 지금 복고인가라는 물음에 충분한 답이 될 수는 없다.

20세기가 돌아오는 이유

현재가 괴로우면 사람은 당연히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20세기를 호출한다는 것은 21세기가 괴롭다는 뜻이다. 즉, 복고열풍은 첫째, 현재의 불만족이 원인인 것이다.

1차적으로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아이돌, 기계음, 댄스음악이 덮어버린 가요계 풍경이다. 대중이 거기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에 70, 80, 90을 호출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리고 더욱 괴로운 현재의 사회상황을 꼽을 수 있다. 한 마디로 각박하고, 황량하고, 차갑다. 우리에게 21세기는 무한경쟁으로 표현되는 불안과 고통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따뜻한 것을 원하게 됐다.

요즘 뜬다는 '엄마' 코드나, 드라마 쪽에서 각광받고 있는 '바보' 캐릭터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불안에 지친 사람들이 엄마의 따뜻한 품을 찾고, 바보의 순수함에서 각박해진 마음을 달래는 것이다. 복고도 이런 따뜻함, 안정감, 순수함 등을 느끼게 한다.

둘째, 복고열풍은 한국대중문화의 성장이나 자부심과도 관련이 있다. 한류열풍이란 건 어쨌든 서양을 보고 배웠던 한국대중문화산업의 성장이 일단락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른이 된 것이다. 그 다음에 할 것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이다. 옛 컨텐츠들은 단순히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우리의 뿌리라는 의미가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건 그 뿌리를 확인하고 재흡수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면 토대가 튼튼해진다.

또, 세시봉에서 <나는 가수다>까지를 통해 우리의 과거가 얼마나 아름다웠고 풍성했었나를 새삼 확인하며 기성세대와 젊은층이 동시에 자부심을 느낀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에게 무시당했던 자신들의 문화가 자랑할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젊은층은 한국문화의 뿌리가 상상 이상으로 크고 넓다는 것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복고 컨텐츠에선 21세기의 화려한 컨텐츠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진정성, 열정 등을 느낄 수 있고, 특히 90년대 한국 대중문화 르네상스 시절의 컨텐츠들은 시간의 흐름을 이겨낼 정도로 대단히 뛰어나다.

셋째, 디지털의 습격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발을 꼽을 수 있겠다. '스마트폰과 얼리어답터의 시대인데도 왜 복고인가?'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디지털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날로그적 정서를 찾는 것이다. 아날로그의 청량함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세시봉의 통기타였고, 그것은 '통기타 든 소녀' 아이유 열풍에도 영향을 미쳤다.

복고가 미래를 잡아먹으면 안 된다

복고열풍에 대한 가장 음산한 해석은 우리 대중문화가 이젠 늙어버렸다는 지적일 것이다. 사람이 어렸을 때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오로지 미래만 있을 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과거에 집착하는 법이다. 미래가 없으니까. 문화도 미래로 도약하는 힘을 잃었을 때 과거의 좋았던 추억에 안주할 수 있다.

그렇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상황이 과거 일변도인 것은 아니지만, <나는 가수다> 현상만은 우려스럽다. <나는 가수다>는 일종의 과거 히트곡 모음인데 그것이 현재의 창작곡들을 완전히 압도하는 상황이다. 대중이 더 이상 신곡을 들으려하고 않고 옛날 히트곡의 재해석에만 매달린다. 바로 이런 것이 우려되는 복고다.

복고는 우리 대중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다양성을 키우며 창조성의 새로운 기반을 다진다는 의미에서만 건강하다. 그저 과거의 좋았던 시절, 빛났던 시절에 도취하는 복고는 퇴폐적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실험성, 모험정신이 넘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 히트했던 것,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만 대접받는 상황에선 모험이 나타날 수 없다. 그러면 미래를 열어가는 활력이 사라질 것이다. 창작자들이 명곡의 편곡에 집중하고, 기획자들이 추억 팔기 상품이나 디자인할 때 무슨 창조적 활력이 생기겠나.

물론, 오로지 최신 가요만 듣던 분위기에서 현재의 복고열풍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거꾸로 '최신'을 압박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다. 과거는 현재를 보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자산이 되어야 한다. 결코 과거가 주인이 되면 안 된다. 이점을 명심해야 건설적인 복고 트렌드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문화평론가, 블로그 http://ooljiana.tistory.com/를 운영하고 있다. 성룡과 퀸을 좋아했었고 영화감독을 잠시 꿈꿨었던 날라리다. 애국심이 과해서 가끔 불끈하다 욕을 바가지로 먹는 아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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