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속옷까지 벗고 뛰었다’라는 표현이 나올 법하다. 12일자 한국경제에 실린 기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경은 10면 <95년 도입 사회봉사명령 ‘제3의 길’로 자리잡나>에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게 집행유예와 함께 사회봉사명령이 11일 선고됨에 따라 사회봉사명령이 ‘제3의 길’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고 전한 뒤 이렇게 전한다.

“사회봉사명령은 징역형을 내리기에는 무리지만 그렇다고 집행유예로 풀어주기에는 죄질이 가볍지 않은 피고인에게 내리는 명령으로 1995년 형법 개정 때 신설된 제도다.”

▲ 한국경제 9월12일자 10면.
‘공인·사회지도층’은 사회봉사 ‘서민’은 징역살이가 당연한가

사회봉사명령의 도입취지를 ‘친절히’ 설명해주는 것까진 좋았는데 문제는 그 이후다. 한화 김승연 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건과 연결시키더니 이렇게 기사를 맺는다.

“개방된 장소인 복지시설 등에서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공인의 성격이 큰 기업 총수나 연예인에게 충분히 부담이 되는 일이며 징벌로서의 효과가 있다는 게 법조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이참에 사회봉사명령을 ‘이런 식으로’ 자리 잡게 하고 싶다는 한국경제의 희망이 반영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한경의 오늘자(12일) 기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하나하나 짚어보자.

우선 사회봉사명령 도입 취지. 사회봉사명령의 그런 취지로 도입이 됐다면 한화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이 그런 취지에 맞는 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재벌 회장이 회사 경호원과 조직 폭력배를 조직적으로 동원해 폭력을 행사하도록 한 것이 ‘징역형을 내리기에는 무리지만 그렇다고 집행유예로 풀어주기에는 죄질이 가볍지 않은 사안’일까.

▲ 한국경제 9월12일자 13면.
한경의 판단은 ‘그렇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만약 평범한 서민이 경호원과 조직폭력배를 동원하기도 힘들지만 ‘모의’를 통해 이 같은 폭력을 사주하고 그 대가로 돈을 지불했다면? 그리고 법원이 집행유예와 함께 사회봉사명령을 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때도 한경이 지금과 같은 주장을 태연히 할 수 있을까.

사회봉사명령이 공인에 대한 징벌적 효과가 크다고?

“개방된 장소인 복지시설 등에서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공인의 성격이 큰 기업 총수나 연예인에게 충분히 부담이 되는 일이며 징벌로서의 효과가 있다는 게 법조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라는 부분도 웃긴다.

한마디로 공인이고 사회지도층이나까 ‘쪽팔림’을 당하는 것만으로도 징벌로서의 효과가 크다는 얘기인데 이 말을 한경의 논리대로 뒤집으면 이렇게 바뀐다.

“개방된 장소인 복지시설 등에서 사회봉사활동을 하는 것은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서민들에게는 별로 부담이 되지 않기 때문에 징벌로서의 효과가 있기 위해서는 징역형을 선고해야 한다는 게 법조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 한겨레 9월12일자 사설.
정도껏 해야 한다. 누구를 옹호할 때도 정도껏 해야 하고 상대를 비난할 때도 최소한의 ‘품격’은 유지해야 한다. 균형감각과 ‘객관적 시선’이 기본이자 생명인 언론은 특히 그럴 필요가 있다. 기업과 총수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견지한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문제의식’은 담아내야 하는 것이 언론 아닌가.

“재벌총수에 대한 법원의 잇단 선처를 바라보는 국민들 시각은 곱지 않다. 재벌 총수에 대한 온정적 판결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는 셈”이라며 한 줄 걸친 같은 날짜 매경의 보도를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경제식의 ‘용감한’ 주장은 사회적 양극화가 점차 심해지고 있는 상황을 전제로 했을 때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것밖에 안된다. 한국경제가 ‘의도’한 게 그것이었다면 목표달성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의 균형감각을 가지기 바란다. 그것이 ‘한국 경제’가 살 길이고 한국경제신문이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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