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는 게임이다.

모든 승부는 게임이다. 그리고 승부의 세계에서 가장 큰 행운은 ‘이행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승부가 끝나고 두 개의 장면이 미디어를 점령하고 있다. 패자의 입장이 되어 김해 시민으로 돌아간 ‘배반의 승부사’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승부의 세계를 떠나게 돼 자유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승부가 좀 더 일찍 끝나기를 원했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달랑 ‘선진화’, ‘실용’, ‘자율과 개방’의 아이템을 들고 새로운 승부를 시작한 이명박 대통령은 승리자의 위용으로 당당하다.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어 뵈는 아이템이지만 그는 ‘해내겠다’는 승리의 다짐으로 충만하다. 어쩌겠는가, 인생 자체가 기적의 승부였다는 그 아닌가.

도래한 ‘괴물의 시대’ : 승부의 이중성과 게임의 빈곤함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어디에선가 <‘양아치 시대’접고 ‘괴물의 시대’로>란 제목의 칼럼을 봤었다. 반드시 받아 들여야 하는 시대와 지나간 시대 모두를 기가 막히게 조롱하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 ‘괴물의 시대’가 시작됐다. 우연찮게도 나는 이 ‘괴물의 시대’를 주로 PC방에서 맞고 있다. PC방은 참으로 묘한 공간이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PC방은 전규찬의 말처럼 ‘즐거운 놀이 공간, 기발한 창작 공간’인 동시에 백수에게 필연적 자기 검열을 불러일으키는 ‘이중(적 잠재)성’과 승부해야 하는 영토이다. ‘괴물의 시대’에 PC방의 이중성은 특히 중요하다. PC방의 이중성을 형성하는 미묘한 사회․정치․문화적 입장들은 이명박의 ‘승부’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이중성을 반영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가 수행하고 있는 ‘게임’의 빈곤한 룰을 폭로한다.

관음을 넘어서는 진짜 승부

▲ 한국일보 2월22일자 온라인판.
얼마 전 건교부는 왕복 4차선 도로에 인접한 건물에서만 PC방 영업을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만약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전체 PC방의 80%가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한다. 업종 학살 정책에 가까운 이 법안이 실제 통과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법안을 마련한 건교부의 변이 또 한 번 기가 막히다. 건교부에 따르면 뒷골목에 PC방이 많으면 탈법과 불법의 온상이 될 수 있단다.

모두가 승부의 화려한 이행이 제공하는 미혹에 눈이 감겼을 때 엄습해 오는 참혹한 학살이 섬뜩한 것은 이행기에도 굳건히 학살을 자행하는 주체가 바로 참여정부라는 사실 때문이다.(그들은 확신했으리라. 뒤이을 정부 역시 자신들의 학살에 적극 동조하리라는 것을)

참여정부는 미려한 수사를 통해 게임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찬양했었다. 적어도 몇 년 간 게임은 산업의 계열, 화폐 가치의 실체로 호명되었고, 그럴싸한 이론과 설명을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지식으로 받들어졌다. 예술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대체하는 ‘흥미로움’을 제시하는 새로운 문화 영역에 대한 진지한 설명이 넘쳐났다.(<바다이야기> 이후 싹 사라진 그 전문가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일단, 게임은 너무 재밌다. 어떠한 재미를 느끼는데 근본적으로 죄의식이 필요치 않다면, 게임의 룰을 잘 이해하고 실제로 즐기는 ‘쿨’한 유저의 입장에 충실할 수 있다면 게임은 찬양되는 것이 마땅하다.

누구에게나 관람의 의무가 부여된 재미없는 승부에 대한 과도한 관음으로 가득 찬 어제 오늘의 매캐한 미디어 환경에서 그나만 PC방의 게임만이 정직하게 일상적 승부의 기쁨을 제공한다. 그런데 왜 이토록 PC방에 대한 공격은 참혹하고 언제나 실패하는 그러나 학살에 준하는 목표를 가질까?

게임은 놀이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PC방에 대한 공격의 핵심적 동력은 게임의 ‘놀이적 기능’에 대한 경멸과 두려움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게임이 다른 무언가를 포기 할 만큼 재밌는 게임에 대한 공포이다. ‘놀이적 기능’에 대한 근대적 오해에 기반 한 ‘게임’에 대한 전통적 경멸과 공포는 꼰대들에게 너무 두려운 것이어서 지속적으로 PC방을 규제해야 한다는 강박을 재생산하고 현실적 의미가 없는 규제를 진지한 해결 방향으로 결정하는 불쾌한 상황들을 수년 째 연출하고 있다.

PC방 영업을 규제 역시 지속적으로 확대되어왔고, 그 명분은 언제나 청소년과 쾌락에 대한 도덕주의가 제공해왔다. 심야시간에 게임에 빠진 청소년들이 늘어남에 따라 수면부족, 건강에 심대한 악영향을 미치는 등 그 부작용이 심각하므로 심야시간에는 청소년들이 온라인게임에 접속하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는 상식 이하의 ‘셧다운(shut down)제도>’가 좌우를 가리지 않고 계속 추진되고 있으며, 검열로서의 연령 등급제 역시 계속되고 있다. PC방을 창조와 재미의 문화적 대상으로 독해하지 못하고 통제와 규제의 행정적 대상으로 이해하는 어른들의 과잉된 불안이 <바다이야기>와 <스타크래프트>를 같은 것으로 만들고 ‘님하 즐겜하삼’의 경쾌함을 교란으로 독해하고 있다. 게임은 놀이하는 인간의 본능이다. 정권이 이행되는 현실적 게임만이 존재해야 하는 건 당연히 아니다. PC방에서 현실적 게임의 강요된 재미, 획일적 승부를 비웃는 진짜 재미들이 초단위로 방단위로 만들어지고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PC방 정책은 문화적 환경과 공간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고, PC방에서 마일리지를 쌓고 있는 세대들의 현실적 상황과 조건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진짜 승부사는 승자 독식 사회의 루저(looser)들이다!

승부사를 자처한 이명박 대통령이라면, 규제는 나쁜 것이라고 일갈했던 그의 신념대로라면, 그의 첫 번째 승부는 경제 영역이 아닌 사회적 문화적 통제와 규제를 철폐하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달랑 이거에 불과한 ‘선진화’, ‘실용’, ‘자율과 개방’의 아이템으로 승부 볼 수 있는 적절한 장은 문화의 영역, 그 중에서도 문화 전쟁에 가까운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PC방이다. 레벨이 맞지 않는데 경제에서 아이템을 남용하는 것은 파국이다. 청소년 보호 이데올로기, 가부장적 보수주의를 넘어서는 선진 이데올로기의 도입, 편견없이 PC방에 대한 맥락적 이해를 도모하는 실용적 자세, 게임하는 세대와의 의논과 대화를 거치는 자율과 개방의 태도로 PC방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것이 단지 게임일 뿐(Just Gaming)’인 사회에서, 학습과 취업의 부담, 존재에 대한 사회의 불인정이라는 이중고에서 루저(looser)들이야 말로 진짜 승부사들이다. 그들의 존재가 승자 독식 사회의 숨통을 트였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해왔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오직 게임에서만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이들이 실시간으로 기생하고 있다. 그들의 영토가 바로 PC방이다. 반드시 그들이 사회․정치․문화의 권력의 중심이 되기를, 그리고 내가 그 ‘이행의 순간’을 반드시 목격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덧붙이는 말>

이명박을 열렬히 지지했던 강.부.자(강남 부동산 부자)와 여전히 ‘노짱 최고’를 외치는 386세대가 만나서 가장 빨리 하나를 정치적으로 합의해야 한다고 치자. 무슨 합의를 하면 될까? 우선, 자식이 게임하는 얘기를 하면 된다. 십중팔구 열에 아홉은 순식간에 게임에 대한 강력한 규제로 입장을 합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행의 순간’에도 변치 않는 강력한 그리고 정치적인 우리 사회 아버지들의 존재이다.

학교라고 믿었던 사회운동을 휴학하고 몸을 더듬어보니 라이타 한 개밖에 없더라는 싸구려 열정에 여전히 감격하는 청년 백수. 을용타에 열광하는 청년 백수들이여,라이타(right-打)하라! 오른쪽을 때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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