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백종훈 원불교 교무] 첫 직장을 얻고 나서 바로 통장을 어머니께 드렸다. 얼마 뒤 어머니는 내 명의로 된 적금통장과 건강보험증서를 보여주셨다. 나는 나대로 연금보험에 가입하고 적립형펀드를 샀으며 승용차를 마련했다. 국민연금 보험료는 월급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갔다.

어느 날부터 부모님은 자금을 보태줄 테니 대출을 끼더라도 집을 사자고 설득하면서 결혼을 종용했다. 하지만 스물아홉 살의 나는 이 모든 것을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얽매는 그물로 여겼다. 더욱이 회사업무와 적성이 잘 맞지 않아 고심했던 터라 나날이 촘촘하게 조여오는 덫을 서른을 넘기기 전에 하루라도 어서 벗어나 새로운 꿈에 도전하고 싶었다.

어머니께 통장을 돌려받고 차를 팔고 건강보험, 연금보험, 펀드를 차례로 해지했다. 사직서를 내고 나서는 국민연금납부예외 신청을 마저 마쳤다. 그 후 2년간, 모아둔 돈을 쓰며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야인생활을 했다.

머리칼을 밀고 전북 진안 만덕산에 들어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고민하던 시절 원불교 승산 양제승 종사님과 방을 마주하고 여름 한 철을 지냈다. “만덕산이 참 좋지. 참 좋아.” 팔순을 넘긴 노 선사(禪師)는 계신 듯 안 계신 듯 산처럼 물처럼 하늘처럼 늘 그 자리에 머무시며 텅 빈 가르침을 베푸셨다. 운명이라 일컫든, 선택이라 이름 붙이든 어느새 그 길에 내 몸을 놓았다.

제주도 산굼부리오름 억새밭 ⓒ 김은희

그즈음 예타원 전이창 종사님을 찾아뵈었다. 정갈한 방에 세간 몇 개가 전부였다. 어른께서는 주로 경청하시고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실 뿐 침묵하셨다. 그러다 동행한 분이 자리를 비우고 단 둘이 되어서야 비로소 말씀하신다. “네가 보듯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너는 이렇게 살 수 있겠느냐?” 긴 세월 그 말을 화두 삼았다.

7년여의 예비수행자 과정을 거쳐 교무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매달 200달러를 받다가 한국에 오니 두 배나 올라 육군 병장만큼이나 수령한다. 다시 국민연금을 내고 의료실비보험에 가입하고 약간 모인 돈은 은행에 예금한다. 세상 물정에 너무 어둡지 않으려고 푼돈으로 주식 투자도 해 본다. 그렇게 그렇게 이미 떠나왔던 시스템 안으로 서서히 되돌아간다.

그러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만치는 아닐지라도 예전보다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크든 작든 부처님께 공양할 재물이 있다는 것, 스승님을 빈손으로 뵙지 않아도 된다는 것, 도반에게 밥 한 끼 살 수 있다는 것, 읽고자는 책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나는 복된 사람이다. 곧 돌아올 아버지 생신에는 아들로서, 조카 돌에는 큰아버지로서 내 몫을 해야겠다. 날이 더 따뜻해지면 장날에 토마토 모종을 사야지. 잘 길러 지리산을 찾을 벗들과 열매를 나눌 테다.

언젠가는 이 여유마저도 흩어질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더 누리게 될지도 모른다. 어찌 되든 괜찮다. 본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없으면 없는 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면 있는 대로 잘 사용할 따름이다. 그러다 때가 되면 다 놓고 홀연히 떠나갈 일이다.

자공이 말했다. “가난하면서도 비굴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거만하지 않다면 어떻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은 못하다.” - 논어 학이편 1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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