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혜인 기자]

# “30대 초반이라고 밝히니 출입처 차장·부장으로부터 ‘빨리 남자 하나 물어’, ‘어딜 가면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어’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인터넷 매체 2년 차 기자)

# “지난해 PD로부터 ‘이번 작가들은 예뻐서 안 잘리는 거야. 저번 작가들은 못생겨서 다 잘렸잖아’란 말을 듣고 문제제기 했더니 ‘이래서 여자작가들과 일하는 건 피곤해’라는 말을 들었다”(12년 차 방송작가)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이해 미디어스는 여성 언론종사자들에게 성별에 따른 차별과 폭력이 개선됐다고 느끼는지 물었다. 기자, PD, 작가 등 만 2년~12년 차 여성 언론종사자 8명 대부분은 ‘미투운동’ 이후 적극적인 신고와 조치로 성폭행은 개선되고 있지만, 성적인 농담 등 성희롱, 은근한 성추행에 의한 괴롭힘은 여전하다고 답했다.

(사진=게티이미지)

직업이 아닌 한 명의 ‘여성’으로 대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신문사 5년 차 A기자는 “남자 기자와 함께 취재원을 만났는데 취재원이 ‘요새 기자들은 다 예뻐’라고 말했다”며 “외모 평가를 받으러 나간 자리가 아닌데 기자가 아닌 여자로 보는 말이 인사라고 해도 기분 나빴다”고 말했다.

인터넷 매체 2년 차 B기자는 “30대 초반이라는 나이를 알고부터 출입처 차장·부장들이 자연스레 ‘결혼해야지’, ‘빨리 남자 하나 물어’, ‘어딜 가면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어’라는 등의 이야기를 정말 자주 한다”고 밝혔다.

12년 차 방송작가 C는 “지난해 한 방송사에서 기획회의 중 의견을 제시하자 ‘여리여리하게 생겨서 왜 화를 내냐’는 말을 들었다"면서 "'이번 작가들은 예뻐서 안 잘리는 거다' 등의 발언을 들어 문제제기 했더니 ‘이래서 여자들과 일하기 싫어’라고 말하더라”고 했다.

3년 차 방송기자 D는 “타사 남자 선배와 취재원을 만난 적이 있는데 ‘방송기자라서 예쁠 줄 알았는데 이런 애 데려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며 “방송기자가 된 뒤로는 외모와 관련된 평가, 성희롱을 정말 많이 듣는다. 이례적인 일이 아니라 공기 같다”고 말했다.

PD, 카메라 감독과 같은 직종에 여성 비율이 늘고 있지만, 편견에서 나오는 발언들은 인사말처럼 오고 간다. 방송사 5년 차 PD는 “명함을 교환하고 섭외전화를 하고 인사도 했지만 제가 여자인데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작가라고 생각하고 대한다”며 “여성이 PD로 일하는 걸 뜻밖의 일처럼 여기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방송사에서는 출연자가 여성 카메라 감독에게 “여성 카메라 감독은 처음 봐서 그런지 섹시하다”는 말을 칭찬처럼 한 일도 있었다.

여기자들을 내근이 잦은 출입처에 배정하거나 주요 출입처에 남기자만 데려가거나, 성별을 구분해 회식 장소를 잡는 경우도 있다. 신문사 A기자는 “우리 기수만 봐도 남자와 여자가 돌았던 취재부서가 다르다. 나를 포함한 여기자는 문화부 등 내근이 많은 부서를 돌았는데 남기자들은 법조, 사회부를 주로 맡는다”며 “대부분의 기수가 주력부서에 남기자를 배치한다. 이건 차별”이라고 말했다.

방송사 D기자는 “부장은 주요 출입처에 남기자만 데려간다. 취재에서 네트워크 형성이 중요한데, 출입 기자가 있음에도 다른 출입처의 남기자를 데려간다”고 말했다. 인터넷 매체 B기자는 “전 회사 대표는 주니어 기자들을 여자·남자로 나눠 여기자들은 야경이 예쁘기로 유명한 레스토랑에 데려가고 남기자들은 편한 술집에 데려갔다”며 “기자들을 여자로 보기 때문에 이렇게 밥을 사주는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았다”고 말했다.

방송기자 D는 주요 출입처 50대 과장으로부터 “같이 출장갈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인터넷 매체 3년 차 E기자는 늦은 저녁 취재원과의 술자리에 참석하라는 전화를 받은 경험이 여러 번 있다고 밝혔다. E기자는 “다른 동기들에게 물어보니 저 외에 이런 연락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며 “이처럼 남성 취재원과 함께하는 술자리에 여성 기자들만 부르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한 방송사는 여성 기자들에게는 정장에 구두를 강요하지만 남자 기자들은 운동화가 허용된다. 내근 업무가 많은 날 여기자가 운동화를 신고 출근했다가 부장으로부터 “여자처럼 입고 다녀라”는 말을 들으며 혼난 적이 있다고 전했다.

대부분 여성 언론종사자, 바로 문제 제기 못해

하지만 대부분 언론종사자는 부당한 상황에서 단호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부장으로부터 저녁 술자리에 참석하라는 전화를 받았던 E기자는 “부당한 자리 참석 요구는 거부해야 하지만 명백히 거절하지 못해 다른 방법으로 돌려 거절했다”고 말했다. 취재원으로부터 “같이 출장가자”는 말을 들은 D기자는 “솔직히 말하면 단호하게 말하지 못한다”며 “중요한 정보를 주는 취재원이다 보니 못 알아듣는 척을 한다던가 다른 말로 돌린다거나 ‘요즘 그러면 고소당해요~’라고 웃으며 넘긴다”고 말했다. 외모 평가를 들었다던 A 신문기자도 “분위기상 바로 대응하면 불편해질까 봐 말하지 못했지만, 그 취재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져 다음부터 만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용형태가 불안정한 작가의 경우 다른 직종에 비해 문제 제기 자체가 힘들다. 프리랜서라는 특수성으로 문제 제기 이후 직장을 관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1년 차 방송작가 F 씨는 지난해 세트장에서 카메라 감독으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 작가와 부딪힌 카메라 감독이 작가에게 이상한 신음소리를 냈고, 방송영상에 굴이 나오는 장면을 보고는 작가를 향해 다리를 벌리고 앉아 “굴이 제철이냐”는 식의 모욕적인 발언을 했다.

이에 작가는 팀장에게 알렸고 프로그램 CP까지 나서 사내 징계위원회가 열렸다. 해당 카메라 감독은 다른 지사로 옮겨졌고 작가는 대표이사로부터 재발 방지와 사과를 받았다. 하지만 작가는 폭력이 벌어지고 난 뒤 5개월이 지난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다.

작가는 “모욕적이었던 상황을 증명하기 위해 진술서를 쓰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등 수차례 반복적으로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게 힘들었다”며 “제 편이 되어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신고부터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일을 겪은 뒤 정신과 치료를 받고 극복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누군가의 헛기침만 들어도 괴로워한다. 결국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는 퇴사요구를 들었다고 한다.

외모 평가에 문제를 제기했던 C 작가 역시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게 되는 수순을 밟았다. 방송작가의 경우 고용주인 PD가 불편하다고 하면 프로그램 개편 등을 이유로 해고를 통보받는 경우가 잦다. 방송사 성평등센터나 양성평등위원회에 신고해도 해결되는 경우가 드물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지난해 12월 30일 발표된 '2019 방송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 보고서'

‘2019년 방송제작 노동환경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방송제작환경의 문제점 중 성희롱 및 성폭력에 대해 심각하다고 응답한 비율이 장르에 상관없이 작가(53%) 및 연출(32.1%) 직종에서 높게 나타났다. 전체 응답자의 25%가 성희롱·성폭력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 중 작가 39.3%(연출 19.9%, 기술 10.2%), 여성 37.6%(남성 6.9%)이 상대적으로 경험이 높다고 나타났다.

원진주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장은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여성 작가들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관행에 성희롱이나 성차별을 당해도 고용불안으로 문제 제기를 못하고 있다”며 “법의 의해 당연히 보호받아야 할 임신, 출산, 육아 문제 등 모성보호도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원 지부장은 “이에 방송작가 유니온은 수시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고용불안으로 문제 제기를 못하는 작가들과 연대해 주체적으로 인권을 존중받을 수 있게 적극적으로 싸우려 한다”며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하다보면 결국 가해자들의 생각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미디어스가 접촉한 취재원들은 대부분 성희롱, 성폭력 등이 충분히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 성희롱이 맞는지 헷갈릴 때 물어볼 수 있는 창구가 많아졌으며, 팀장급에 여성 비율이 높아져서 문제 제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방송기자 D는 “30대 홍보팀 남자직원을 만났는데 ‘우리 회사에서 제일 예쁜 기자’라고 저를 소개하는 선배의 발언에 ‘그런 언급은 불편할 수 있으니 자제해달라’는 말을 하셨다”며 “충분히 의식을 바꾸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한 PD는 “여성 패널을 섭외할 때 조금 더 이슈가 될 수 있는 예쁜 사람을 찾고 ‘그림이 된다’는 등의 외모 평가를 농담처럼 한다”며 “PD들은 섭외하는 게 주요 업무라서 더욱더 사람을 평가할 때 외모는 배제하고 발언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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