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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꽃필 무렵[여해, 바다와 같아라]
백종훈 원불교 교무 | 승인 2020.03.06 10:05

[미디어스=백종훈] 텅 빈 극장에서 혼자 영화를 볼 줄은 미처 몰랐다. 기분 내서 찾아간 중화요리집에도 손님 하나 없다. 전주와 함양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분들이 발견되자 확진자가 없는 남원에도 긴장감이 돈다. 법회는 중단되었다.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는 마스크 구하기가 어려우니 혹시 있으면 보내달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꼬맹이 시절과 오십대 초반에 두 번 폐결핵을 크게 앓으셨다. 그때 폐 조직이 망가진 데다 지금은 허파꽈리에 곰팡이가 슬어서 진균제를 드시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호흡기 질환에 걸리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이 난리에 식겁하셨을 게다.

마침 마스크를 넉넉히 갖고 있다. 이십대 중반에 폐병을 겪고 난 후 찬바람이 불거나 먼지가 심하면 기침이 심해서 평소에 미리 챙겨두었다. 그 가운데 절반을 덜어서 봉투에 담았다. 거기에 값싸게 나온 공적마스크를 사서 보태려 했다.  

2월 18일 오후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마을의 매화나무가 지리산 노고단 설경을 배경으로 꽃망울을 터뜨리며 아름다운 자태를 선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3월 2일 아침 아홉시 조금 넘어 농협 하나로마트에 갔는데 뜻밖에 한산했다. 개점하고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직원 혼자 물건을 정리하며 분주했다. 손님을 맞으면서도 누군가와 크게 통화했다. 마스크는 모든 매장에서 11시부터 팔며 개당 850원으로 가격등록 한단다. 그리고 한 사람이 여러 번 사는 걸 막으려고 사인을 받겠다고 했다. 

시간이 멀어서 1.5km 떨어진 우체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골 우체국 앞에는 전례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도로가에 수많은 차가 서 있다. 주차장에는 긴 줄이 생겼다. 마스크를 사려는 행렬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에서 꼬맹이들까지 두꺼운 옷을 껴입고 쌀쌀한 아침 기온을 견디고 있었다. 당신들 몫 말고도 도시에 사는 가족들 부탁으로 온 분도 여럿 있다. 그러나 우체국에서 가지고 있는 재고는 1인당 5개 80명분뿐이었다. 

마스크 사려는 마음을 접고 준비한 만큼만 부모님께 부치려 실내 창구로 들어갔다. 한 중년 남성이 성난 표정으로 11시부터 마스크를 팔면서 11시에 번호표를 나눠주니까 주민들이 밖에서 추위에 떨지 않느냐며 우체국직원에게 거세게 따진다. 

나는 그에게 농협에서도 11시부터 판매하는데 그쪽에는 줄이 없으니까 그리로 가보시라고 말씀드렸다. 헌데 그는 도리어 화를 내며 거기서는 안 판다고 목에 핏대를 세운다. 2월 28일부터 우체국에서 살 수 있는지는 알아도 3월 2일부터는 하나로마트에서도 파는 건 몰랐나 보다. 

긴급재난문자가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 TV, 라디오, 신문, 인터넷에서 너나 할 것 없이 전염병 확산과 늘어나는 사망자 수를 알린다. 졸업식과 입학식이 취소되고 개학이 연기되었다. 인적 뜸한 거리에서 상인들의 한 숨이 깊다. 어그러진 일상과 만연한 공포가 자아낸 스트레스에 짜증이 뻗쳐 서로를 찌른다. 

마스크를 쌓아놓고 폭리를 취하는 장사치,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무리, 혐오와 갈등을 부추기는 모리배, 국민들의 불안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배, 미지의 병과 분투하는 의료진, 갖은 노력을 다하는 질병관리본부, 대구·경북으로 이어지는 온정의 손길,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제 자리를 지키는 시민들... 사뭇 다르지만 옳고 그름은 있을지언정 어느 누구 하나 밉다고 쳐버리고 곱다고 애착할 바 없는 그저 드러난 우리의 민낯이요 치러야 할 성장통이다. 
 
돌림병이 퍼질 때마다 어떤 이는 요한계시록의 환란이 바야흐로 도래했으니 자기를 따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봄과 여름, 가을을 지나 맞이하는 매서운 겨울바람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계절 지나면 어김없이 다시 새순이 돋고 꽃이 핀다. 늘 그래왔듯이.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 거처로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하늘이 푸르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배를 드러내고 시멘트 포장길 위에 누워 낮잠 자던 길고양이가 차 소리에 눈을 떠 슬며시 몸을 피한다. 길가에 높게 쌓인 거름 부대 곁을 지나며 차창을 내린다. 흙냄새가 향긋하다.

도량 가까이 매실나무 가지에 매화가 몽우리를 터트리기 시작한다. 겨울 끝자락에 핀 봄꽃이다. 늦지 않게 나무 둘레에 퇴비를 줘야겠다. 썩은 나뭇가지도 걷어 줘야지. 꽃이 만개하면 그리운 님 불러 봄 내음을 나누리라.

근래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은 말세가 되어 영영 파멸 밖에는 길이 없다고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노니...돌아오는 세상이야말로 참으로 크게 문명한 도덕 세계일 것이니, 그러므로 지금은 묵은 세상의 끝이요, 새 세상의 처음이 되어, 시대의 앞길을 추측하기가 퍽 어려우나 오는 세상의 문명을 추측하는 사람이야 어찌 든든하지 아니하며 즐겁지 아니하리요. 원불교 대종경 14:19

단야선방 mayzephyr.tistory.com 

 

백종훈 원불교 교무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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