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사람의 인간성은 얼마나 대단할까. 대부분의 사람이 어느 정도의 인품은 가지고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 인품이 실망스럽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어떤 모순됨 자체가 인간성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상황에 따라 이타심도 베풀고 야비해지기도 하는, 그러면서 야비함을 정당화하는 ‘보통 사람’이란 걸 인정한다면 타인을 이해하는 데도 폭과 깊이가 생긴다.

야비함을 정당화할 생각도 하지 않는 위악의 시대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 나름의 합리화 기제를 찾아서 편승한다. 차별의식을 능력주의로 정당화하고, 사회적 평판을 피드백받지 않는 인터넷에서 배설하고, 자기보다 약해서 후환이 없는 사람들한테 본색을 드러낸다. ‘그래도 되는 상황’이 오면 서슴없이 '보통'의 범주를 벗어나는 보통 사람들.

도덕성은 작위가 아닌 부작위에 기반을 둔다.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제심이 기본이기에 보상 체계가 약하고 재미도 없다. 부도덕은 반대다. 반칙을 쓰면 더 많이 얻을 수 있고, 금지된 욕망은 쾌락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량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충분히 선하지 않지만 악행에는 방아쇠가 달려있다. 선인은 적고 악인은 많다. 오늘날 선행이 아이스 버킷 챌린지 같은 과시적 시혜 행위와 PC 운동 같은 부도덕한 타인을 향한 징벌을 통해 실천되는 건 그런 이유다. 보상체계가 약한 도덕 행위에 도덕성을 벗어난 보상체계를 덮어씌워 실천을 고무하는 것이다. 인간은 선행을 할 때조차 선하지 않다. 그런데, 그 선하지 않은 선행이 누군가의 급한 불을 꺼주거나 악을 징벌하는 효과를 낸다. 인간은 가증스럽고 표리부동하다.

약자를 향한 도덕적 환상이 위험한 건 약자를 대상화하며 주체성을 무시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과 권력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약함과 선함은 동의어가 아니다. 만약 약자가 강자보다 악한 일을 덜 한다면, 남을 괴롭힐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약자일수록 작은 악행을 저지르기 쉽다. 불리한 삶의 조건을 버텨내는 과정에서, 강자보다 권력에 예민해지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거꾸로 활용할 전략을 궁리하게 된다. 그건 강자에게 빌붙는 전략일 수도 있지만, 대개 자신보다 약한 인간을 뜯어먹는 전략이다. 먹이 사슬이란 게 그렇다. 쥐가 고양이에게서 도망치고 참새를 잡아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경치. 이성의 눈으로 본다면 위선이지만, 힘의 논리는 세상의 섭리라 부를 것이다.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건 중요하다. 그런 도덕적 감정이입이 없다면 사회문제고 뭐고 환기할 수도 없다. 그런 한편 고통이 인간에게 도덕적 능력조차 보상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차별과 가난은 낭만이 될 수 없다. 약자도 나처럼 욕망과 속셈을 품은 인간이고, 보드라운 이불을 덮고 자는 나보다 독하고 절박할 수도 있다. 이런 냉정한 이해를 거친 후에 현실의 대안에 이를 수 있다. 인간과 권력을 보편적으로 제어하는 제도와 합의를 세우고, 먹이사슬의 세상을 수평적 구조로 평탄화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장치들은 더 큰 폭력을 저지르는 강자들을 더 세게 옭아매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영화 <1987> 스틸 이미지

정의를 말하는 대부분의 서사물은 선보다 악을 공들여 묘사하며 이야기의 매력을 끌어내는 도착에 빠져있다. 언젠가 개봉한 영화 <1987>이 그랬다. 남영동 대공분실 박 처장은 다른 인물을 압도하는 비중에다 강렬한 카리스마와 어슴푸레한 내면 풍경을 보여준다. 열사의 유족들은 관객의 심금을 쥐어짜는 버튼으로 오열을 터트리고, 열사는 가시 면류관을 쓴 예수처럼 거룩하게 죽어간다. 정의는 내 삶의 안녕과 맞바꿔서 결행해야 하거나, 공권력에 의해 집안이 풍비박산 난 후에야 뉘우치고 따를 수밖에 없는 역사의 명령이다. 선이 보통 사람들의 삶과 분리되고 삶의 요구와 합치하지 않는 곳에서, 선은 지루한 선비 놀음이고, 도덕적 순결함을 과시하는 무기요, 가진 자들의 자아실현이 된다. 이런 곳에서 내 이해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의사표현이 순수성을 심문받고, 공공의 도덕에 복무하라고 명령받는 건 당연하다.

악한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 선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것, 악역에겐 사연과 인간미가 넘치지만 선한 인물은 어떤 사연도 없이 선하다는 것. 이런 건 선악 이분법을 넘어선 인물탐구가 아니라, 또 다른 이분법에 빠진 타성이다. 절대악을 그리는 것만큼 절대선을 그리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본성은 그렇고 그런 것이지만, 선함은 특별히 타고 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안도감을 줄 수 있으므로. 선과 악은, 그런 관념적 대립항이 아니라, 현실을 운영하는 매뉴얼로서 세속화되어야 한다. 그릇된 일을 하면 처벌받고 옳은 일을 하면 보상받는, 내 삶과 공동체를 가꾸는 원칙으로서 말이다. 이렇게 될 때 ‘선과 악’이라는 막연한 이름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질 것이다.

‘선과 악’을 다루는 이야기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악을 향한 관심, 악을 인간화하고픈 욕망에서 벗어나 선을 인간화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현실에는 탁월한 악인도 고결한 선인도 드물다. 겁 많고 야비하고 졸렬하지만, 누군가에겐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적당한 이타심을 품은 '보통 사람'이 다수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특별한 각오를 하지 않고도 세상에 보탬이 될 수 있는지, 그것이 제 삶의 욕망과 부합할 수 있는지, 선한 행동을 제약하고 끌어내는 현실을 관찰하는 이야기가 늘어나야 한다. 이것은 작은 인간들의 작은 마음에 흥미를 둘 때 수행할 수 있는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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