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백종훈] 십대시절의 나는 동양고전에 흠뻑 빠져 대학에 가 더 깊게 공부하리라 마음먹고 한국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동기들 다수는 전공공부보다는 고시나 취업준비에 바빴다. 군자가 되리라던 친구들도 강의실에서 길을 찾지 못해 헤매다 지쳐 돌아선 경우가 적지 않다. 수신(修身)의 의미를 경전을 들어 가르쳤다면 마음과 행실을 익히는 실행도 지도해야 하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수양은 각자의 몫이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원불교 출가자가 되어 원불교학과에 편입한 내 눈에 비친 풍경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처님의 말씀을 글로 배우는 과정과 몸으로 닦고 마음으로 깨달아 얻는 공부가 균형을 이뤄야 하나 이론에만 치우친 교육으로 도반들은 갈팡질팡했다. 이건 아니라는 불만이 예비교무들 마음에 차곡차곡 쌓였다.

학생회는 교육담당부서에 소통의 장을 열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모처럼 모인 자리의 분위기는 기대와 달랐다. 모욕에 가까운 질타가 이어졌고 권위적인 태도로 후배들을 짓눌렀다. 어린도반들은 숨죽였으나 머리 굵은 나는 가만있지 못했다. 조목조목 반박하며 거세게 대거리했다. 그동안 눌러왔던 화가 순식간에 폭발해 몸을 부르르 떨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언성 높은 설전이 오가다 결국 퇴실 당했다.

만덕산 초선지원불당에서 바라본 전경

그길로 기도실에 가 문을 걸었다. 촛불을 켜고 몸을 앉혔다. 부끄러웠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또렷한 정신으로 밤을 지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고를 떠나 꼭 그래야만 했을까. 좀 더 지혜로울 수는 없었을까.

이튿날 기숙사 사감 안효길 교무님은 감정조절 못하면 수도인이 아니라며 젊잖게 타이르셨다. 그 뜻을 받들어 지난 저녁에 맞붙었던 교무님을 찾아가 무례를 사과했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허나 격분하던 내가 수치심에 잠긴 나로 바뀌었을 뿐 감정에 휘둘리기는 매한가지였다. 자괴감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했다.

“야! 백종훈!”

골똘히 생각에 잠겨 고개 숙인 채 자전거 타고 가는 길에 등 뒤에서 크게 날 부르는 젊은 여자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브레이크를 급하게 잡았다. 도량 안에서 그런 식으로 호명되긴 처음이었다. 그 한 소리가 임제의 할(喝)이 된 찰나에 홀연히 마음이 열리니 숨 못 쉬게 조여오던 자책감이 놀랍게도 한순간에 자취 없이 흩어져버렸다. 고개 돌린 내게 사형제(師兄弟) K가 손을 높이 흔들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그로서 끝은 아니었다. 이후로도 이따금 느닷없이 버럭 했고 또 반성하기를 거듭했다. 다만 빈도와 세기가 줄어드는 데서 시나브로 나아지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가을 어느 날, 이침 놓는 분에게 나의 건강상태는 어떤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내 귀를 찬찬히 살피시더니 병첨이라는 혈 자리에 주름이 있다며 평소에 가끔 욱하지 않느냐고 물으셨다. 지난날의 마음작용 하나하나가 모여 나도 모르게 귀에 자국을 남겼나보다. 그 흔적이 짙어지고 옅어지고는 다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한다.

몸이 보여주는 과거의 마음, 마음가짐이 지어낼 미래의 몸 그 가운데 나는 서 있다. 언제고 손님처럼 어김없이 찾아올 ‘분노’에 거칠게 맞장구치다 그가 떠난 빈자리에 ‘후회’를 들이기보다 “차나 한 잔 마시고 가게(喫茶去)” 여유를 나누는 벗 삼고 싶다.

달리는 수레를 멈추게 하듯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는 이를 나는 진짜 마부라고 부르겠다. 다른 사람은 고삐만을 쥐고 있을 뿐이다 - 법구경 17.분노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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