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KBS 강릉방송국에서 2009년부터 12년 간 라디오 작가로 일해 온 박경희 프리랜서 작가가 계약해지를 통보 받았다. 박 작가는 계약 해지가 부당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KBS 강릉국은 박 작가 계약 해지는 프로그램 성과와 제작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프로그램 개편에 따른 것으로 문제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해당 프로그램은 지난해 하반기 KBS 자체 프로그램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또한 박 작가는 정규직 PD로부터 '짤라버린다'는 위협에 시달렸다.

KBS 강릉방송국 전경 (KBS 강릉국 홈페이지)

KBS 강릉국은 지난 13일 박 작가에게 문자로 오는 3월 16일자 계약만료를 통보했다. 계약만료 근거는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다. KBS는 지난 2018년 10월 방송작가 집필 표준계약서를 시행했다. 방송산업계 비정규직 문제가 터져나오던 시기로, 방송작가 표준계약서 문제가 국정감사 지적사항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박 작가는 지난해 2월 KBS와 표준계약서를 작성했다. 표준계약서는 프로그램 개편을 계약 만료 시점으로 규정하고 있다. KBS 전체 방송작가 중 KBS와 계약서를 작성한 방송작가는 1.9%에 불과했다.

18일 미디어오늘 기사 <KBS강릉방송국 가른 두 개의 목소리>에는 박 작가 계약 해지에 대한 KBS 강릉국 측 입장이 상세히 적시돼 있다.

해당 기사에서 이 모 KBS 강릉국장은 "1년에 한두 번, 성과가 안 나올 경우 프로그램을 개편한다. 개편에 대한 변동은 제작진을 꾸리는 것까지 포함된다"며 "라디오 제작PD가 전부 4명이고 이들이 제작팀을 꾸리는데 모두 박 작가와 재계약을 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편성부장이 박 작가에게 통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전 모 PD는 "작가 한 사람 때문에 국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전 PD는 "리포터와 프리랜서 작가, 기상캐스터가 박 작가와 일을 하지 못하겠다고 공동 호소문을 국장에게 제출한 걸로 안다"며 "호소문을 냈는데도 해결하지 못해 미안한 상황에서 박 작가가 성평등센터에 성희롱 행위를 고발해 버렸고 전 직원을 조사했는데 무고가 나왔다. 프로그램 개편 시기가 와서 박 작가와 같이 일하려고 하는 PD들이 없음을 확인한 것인데 박 작가가 보복 프레임을 들고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KBS 강릉국 측 인사들의 이같은 발언은 박 작가의 주장, 해당 프로그램의 성과지표 등을 보면 상당부분 배치되는 주장이다. 우선 박 작가가 맡고 있는 KBS 강릉 라디오 프로그램 '정보매거진'은 지난해 가을 KBS 전체 지역 라디오 평가에서 1위를 한 프로그램이다. KBS는 자체 지역 라디오 프로그램 평가를 상반기에는 오전 시간대 프로그램, 하반기에는 오후 시간대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다. '정보매거진'은 오후 프로그램으로 1년에 한 번 이뤄지는 평가에서 최우수 평가를 받았다.

박 작가가 계약 해지 위협에 시달려왔으며 이에 대한 정황은 2018년 12월 11일 당시 KBS 강릉국장에게 보낸 탄원서에 자세히 실려있다. 박 작가는 해당 탄원서로 사과를 받아냈다.

탄원서에서 박 작가는 KBS 강릉국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대략 4~5년 쯤 뒤 전 모 PD가 강릉국에 왔다고 했다. 전 PD는 TV 프로그램을 전담하고 있어 박 작가와 업무관련성이 없다.

그런데 2018년 말부터 박 작가는 전 PD가 자신을 "짤라버린다", "처리한다"는 말을 했다는 내용을 주변으로부터 듣기 시작했다. 강릉국에서 박 작가가 일한 지 10년째 되던 해다. 박 작가는 전 PD가 그 무렵 사무실 안에서도 "짤라버린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고 토로했다. 전 PD는 사무실에서는 자르려는 대상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박 작가는 '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른다는 대상이 저라는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고 탄원서에 털어놨다.

탄원서에는 박 작가가 전해 들었다는 "짤라버린다"는 내용이 구체적인 시점, 대화내용 등으로 적시돼 있다. 이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2018년 12월 6일(목요일), 개국기념 리셉션 끝나고 커피 마시는 자리. 참석자 OOO, ▲▲▲, 그리고 일부 여성 프리랜서들

전 PD : 박 작가가 힘들게 하는 거 있으면 말해. 짤라 버리게. (아무도 대답 안 하니) 왜 대답 안 해. (재차 ▲▲▲에게) 박 작가가 힘들게 하지 않니?
▲▲▲ : 잘 해줍니다
전 PD가 OOO에게 : 정보매거진 원고 3시까지 써 주는 거 피곤하지 않냐?(OOO가 아니라고 하니)힘들잖아, 힘들잖아.

12월 6일 저녁

전 PD, OOO에게 : 바쁜데 원고 쓰는 거 힘들지 않냐? 프로그램에서 빼줄게

2018년 12월 7일(금요일), 점심식사. 참석자 ■■■, ★★★, ◆◆◆ 외 2인

전 PD : 아침 간부 회의 때 나온 아이템을 저녁에 방송하더라고. 위 국장과 직접 아이템을 거래한다는 거지. (중략) 나는 20대 젊은 프리랜서들을 좋아해.
◆◆◆ : 그럼 나이든 작가들은 프리랜서가 아닙니까
전 PD : 나는 그래도 젊은 프리랜서들이 스트레스 안 받고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어. 내가 젊었을 때는 작가들 많이 짤랐어. 지가 PD야, 왜 애들을 힘들게 하고 스트레스를 줘. 그래서 짤라야 돼. 이번에는 증거가 없으니까 그냥 넘어가는데, 연말까지는…
◆◆◆ : 짤라 내겠다는 얘깁니까?
전 PD : ◆◆◆씨는 이제 빠지고, 내가 짜릅니다.

박 작가는 이 같은 대화내용을 전해 듣고 세 가지 상황을 유추했다. 전 PD가 젊은 프리랜서들을 상대로 박 작가를 잘라낼 구실이 없는지 찾고 있다는 것, 박 작가가 담당PD 허락도 없이 국장과 아이템을 직거래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것, 현재는 증거가 없지만 연말까지 잘라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것 등이다.

박 작가는 탄원서에 "작가도 엄연한 직업이고 KBS 안에는 아주 많은 작가들이 일하고 있다. 저는 지금의 제 직업을 소중히 여긴다"며 "전 PD님이 근거도 없이 휘두르는 무자비한 갑질에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희생되고 싶지 않다"고 썼다.

당시 ◆◆◆, ★★★ 등의 동료들이 박 작가에게 한 말도 탄원서에 함께 실려있다. ◆◆◆는 박 작가에게 "나 혼자 남았어. 내가 해줄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야. 이제부터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돼"라고 말했다. ★★★는 "전 PD의 실체를 인정하고 타협해. 사무실에서 그 사람이 왕이고 실세잖아"라고 했다.

박 작가는 "국장께 호소한다. 전 PD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강릉에서는 국장님이 유일하다"면서 "다만 결코 어설프게 전 PD하고 화해할 수는 없다. 그가 지금 하는 행위는 언어폭력이고, 약자에 대한 인권침해이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사실조사를 하고,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책임을 묻고 공개적인 사과도 추궁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해당 탄원서가 접수되고 3일 뒤인 2018년 12월 14일, 당시 KBS 강릉국장은 국장실에서 ■■■ 편성부장, 전 PD, 박 작가를 불렀다. 그리고 전 PD가 박 작가에게 공개 사과를 하도록 했다. 당시 전 PD가 박 작가에게 한 사과발언은 "회사를 시끄럽게 하고 박경희 작가에게 상처를 드린 점 사죄드립니다"였다.

전 PD 사죄 후, 지난해 4월 고성·속초 산불 발생 당시 KBS 강릉국은 "여기는 고성 산불 현장"이라는 기자의 거짓 멘트를 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이 일로 당시 KBS 강릉국장이 물러났고, 후임으로 현 이 모 KBS 강릉국장이 부임했다. 앞서 2월엔 춘천 KBS에서 온 경 모 PD가 강릉국 편성부장으로 부임했다. 이 강릉국장, 경 편성부장, 전 PD는 16기 PD 입사동기로 춘천 KBS에서 함께 근무한 바 있다.

이 국장 부임 직후인 지난해 6월 17일, KBS 강릉국은 제작비를 이유로 편성부 프리랜서 9명에 원고 출연료 삭감을 통보했다. 9명 중 2명은 28%, 7명은 10~12%의 임금을 삭감한다는 내용이다. 박 작가는 28% 삭감 대상자였다. 박 작가가 KBS와 체결한 '방송집필 표준계약서'에 따르면 계약 내용의 변경 시 상호 합의하에, 서면에 의해서만 변경할 수 있지만 협의 절차는 없었다. 그해 7월 1일부로 박 작가의 원고료는 28% 삭감됐다.

이후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박 작가는 6월 17일, 전 PD와 경 모 편성부장을 상대로 그해 5월 9일 강릉의 한 식당에서 발생한 편성부 성희롱 의혹 사건을 KBS 성평등센터에 고발했다.

해당 사건에 대해 KBS 성평등센터가 2019년 7월 29일 내린 결론은 '성희롱에 해당하지 않는다'이다. 그러나 성평등센터는 박 작가가 허위의 사실을 신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부당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관리 감독할 것을 강조했다.

"업무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공식적 회식자리이자, 일반 식당에서 피신고인 1 등이 여성 프리랜서에게 '춤을 춰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행위 등은 부적절한 언행으로 판단되며, 보강증거가 존재할 경우에는 성희롱으로 판단될 가능성도 상당하므로 주의를 요한다."

"이 사건 신고를 이유로 신고인 및 신고인에게 조력한 자에게 불리한 처우가 취해지지 않도록 관리·감독할 것을 성평등센터장 및 신고인 소속 부서장에게 권고한다."

"특히 본 사건의 경우, 비록 인정사실이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되지는 않았지만, 피신고인 1 행위 자체의 부적절한 측면 때문에 성희롱이 성립할 개연성이 있었던 점, 피신고인 2 역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화를 상당시간 이어나갔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신고인이 피신고인으로 하여금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의 사실을 신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고인에게 부당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관리·감독할 것을 강조한다"

전 PD가 "무고가 나왔다"고 한 사건에 대한 KBS 성평등센터의 결정문 내용이다.

전 PD가 강조한 프리랜서 작가의 호소문에 대해 박 작가는 위계에 따라 작성된 호소문이라고 보고 있다. 강릉국 프리랜서 공동 호소문은 지난해 6월 27일 나왔다. 박 작가와 함께 일하지 못하겠다는 내용의 해당 호소문은 이 모 강릉국장,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등에 제출됐다.

박 작가에 따르면 해당 호소문과 관련해 언론노조 KBS본부는 사실관계 파악을 위해 호소문 작성 당사자인 강릉국 프리랜서들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호소문과 관련한 사실관계는 입증되지 못했고, 해당 호소문은 파쇄된 것으로 안다고 박 작가는 전했다. 이어 박 작가는 "PD들이 생사여탈권을 쥔 상황에서 프리랜서들은 어떤 결정을 해야 하는지 피부로 먼저 느낀다"고 했다.

또 박 작가는 방송집필 표준계약서가 사측 필요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금 삭감 시에는 표준계약서에 명시된 합의 절차가 무시되고, 계약 만료 통보에는 표준계약서의 프로그램 개편이라는 근거가 적용됐다는 것이다. 박 작가는 표준계약서 도입 이전인 지난 10년 간 구두계약이나 별도의 사전 협의, 통보 없이 계약연장을 이어왔다고 말했다.

KBS 강릉국 측은 이 같은 사례들과 이번 박 작가 계약만료는 별개의 건이라는 입장이다. 이 강릉국장은 24일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이번 프로그램 개편의 구체적 기준을 묻는 질문에 "프로그램 내용과 포맷, 인력구조의 변화, 평가결과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한 것"이라고 답했다. KBS 자체 평가에서 해당 프로그램이 1위를 차지한 것과 관련해서는 "1위를 한 것은 맞다"면서도 종합적 고려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 국장은 "계약만료 부분의 가장 결정적 인자는 여기 제작진들이 박 작가와 일하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종합하면 프로그램 평가결과나 작가의 업무역량보다 제작진 의견에 따라 계약만료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 국장은 이를 '제작 자율성' 보장에 따른 결정이라고 했다.

박 작가의 성희롱 사건 신고와 KBS 성평등센터 결정문 등이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 국장은 "전의 일과 재계약 건은 무관하다"고 말했다. 방송집필 표준계약서 적용 문제와 관련해 이 국장은 "과거의 일을 계속 이것(계약 해지)과 연결시키면 다른 내용이 되어버린다. 전혀 별개의 건"이라고 답했다. 이 국장은 이 같은 계약만료가 강릉국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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