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프로듀스 그룹은 어떤 존재였을까? 엠넷 아이돌 오디션 <프로듀스> 시리즈로 탄생한 그룹들을 말하는 것이다. 지난여름 투표 조작 사태가 벌어졌고 사태의 윤리적 오점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다만 이 방송이 한국 아이돌 시장의 지축을 흔들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프로듀스> 시리즈가 다시금 재개되긴 불투명해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방송이 남긴 것은 무엇이었는지 정리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시범 격으로 시작된 첫 시즌부터 시즌4까지 여지없이 성공을 거뒀다. 방송의 시청률과 화제성은 갈수록 줄어들었지만 방송의 코어 팬덤, 그러니까 데뷔 그룹의 팬으로 이어지는 시청자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 증거로 아이오아이, 워너원, 아이즈원, 엑스원은 나중에 배출된 그룹일수록 음반 판매량이 더 많았다. 아이즈원은 아이오아이의 초동 음반 판매량을 두 배 이상 경신했고, 엑스원의 데뷔 앨범 역시 워너원의 모든 앨범보다 초동 판매량이 높았다. 말하자면, 시즌 1과 시즌 2로 탄생한 그룹이 대중성과 팬덤을 모두 확보했다면, 시즌3과 시즌4는 코어 팬덤에 더 특화된 그룹이었다. 시즌3에 이르러 일본 걸그룹 AKB48 멤버들이 연습생으로 참가하며 한일합작이 시도됐는데, 이 점은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오디션 방송 시리즈가 취할 수 있는 나름의 획기적인 포맷 변환이었다.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 방송이 아이돌 시장에 미친 영향 중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새로운 아이돌 소비자의 유입이다. 매 시즌 아이돌 팬덤 시장에 발을 들인 새로운 소비자, 기존 아이돌 팬덤의 여집합이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특히 세 번째 시즌 <프로듀스 48>의 경우 한일합작이라는 포맷이 남성 시청자들 사이에서 큰 호기심을 끌어냈다.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그 어느 시즌 못지않은 열기가 조성됐었다.

<프로듀스>가 산업 생태계에 미친 영향 역시 한 가지로 규정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절대다수 참가자들이 ‘중소 기획사’ 연습생으로 구성되고, 데뷔 그룹으로 활동하는 동안 CJ ENM 산하 레이블에 차출/임대된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중소 기획사 그룹을 아이돌 인력 자원을 제공하는 하청 업체로 거느리는 면이 있다. 다만 이것이 단순히 기획사들에 대한 착취라거나 ‘중소 기획사’들의 자생성을 빼앗아간다고만 정리하기 힘든 복잡성도 있다.

<프로듀스> 방송은 데뷔 당락자를 가리는 시스템이지만, 방송에 출연하는 것 자체로 출연자와 기획사가 얻어가는 부분도 있다. 방송 노출을 통해 인지도를 얻게 되고 경연 과정을 거쳐 개인 팬덤을 확보하게 된다. 실제로 꼭 데뷔하지 못하더라도 그 두 가지 자산을 확보할 목적으로 연습생을 참가시키는 기획사도 있었을 것이다. 합격을 위한 청탁뿐 아니라 연습생을 자사의 데뷔 그룹으로 남기기 위해 합격시키지 말아 달라는 청탁도 있지 않았겠냐는 이야기가 나온 건 그런 맥락이다.

언젠가부터 ‘중소 기획사’의 걸그룹이 대형 기획사 걸그룹만큼 성공을 거두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이 되었다. 그 시점은 <프로듀스>의 론칭 시기와 어느 정도 포개진다. 하지만 <프로듀스>가 일으킨 부작용에 앞서 아이돌 시장이 대중적 확장성을 잃고 팬덤 세일즈가 강화된 점, 음원차트 질서의 교란과 같은 구조적 환경이 변수로 깔려있다. 걸그룹의 경우 보이그룹에 비해 코어 팬덤이 훨씬 약할 수밖에 없는데, 대중적 수익 모델이 약화되면서 예전만큼 성공하기 요원해진 것이다. 그 증거로 보이그룹의 경우에는 같은 기간 동안 기획사 플레디스의 세븐틴과 같이 비 3대 기획사 아이돌이 성공을 거두는 모델이 등장했고, 뉴이스트처럼 <프로듀스> 방송의 효과를 등에 업고 부활한 케이스도 있다. <프로듀스> 시리즈는 산업적 흐름상 자립할 기반이 약해져 가는 걸그룹을 론칭하는 기획사들을 자신의 생태계 안에 거느리고 일정한 낙수 효과를 구하게 하는 반(半)종속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아이즈원(위)과 엑스원 [연합뉴스 자료사진]

<프로듀스> 그룹들이 균열을 가한 건 기존 3대 기획사 중심의 시장 질서이기도 하다. 각 ‘중소 기획사’에서 선별된 인적 자원, 방송과 매니지먼트를 연계하는 수직계열화의 힘을 통해 대형 기획사에서 배출한 탑 아이돌에 버금가는 대중성과 팬덤 파이를 확보한 채 데뷔했다. 꼭 방송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프로듀스> 방송이 시작된 시기 전후로 대형 기획사의 신인 보이그룹은 예전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7일 컴백을 앞둔 아이즈원 역시 아직 앨범을 발매하지 않았음에도, 예판만으로 15만 장을 판매하며 역대 걸그룹 초동 기록을 거의 갱신한 상황이다. 물론 그 균열이 시장의 다양성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 공룡들이 활보하던 들판과 밀림에 새로운 공룡이 나타나 각축을 벌인 것이다.

<프로듀스> 방송이 아이돌 시장을 할퀴고 간 상흔은 여기에도 있다. 경연의 최종적 과정에 조작이 있었음이 드러났지만, 자신이 미는 연습생을 데뷔시키기 위해 각 팬덤이 수면 위와 수면 아래에서 과열된 경쟁을 벌이는 ‘원픽’ 시스템은 방송의 진행 과정을 지배했다. 그만큼 경쟁의 참가자들은 여론전과 안티 행각 등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며 싸웠고 그 점은 방송 이후에도 서로 간의 은원으로 남았다. 또한 앞선 시즌으로 데뷔한 그룹을 다음 시즌의 그룹이 밀어내며 매니지먼트 자원을 승계받는 시스템 상, 데뷔 그룹 팬덤들 사이의 관계 또한 어그러질 소지가 크다. 그리고 기존 시장의 파이를 가지고 있던 아이돌의 팬덤, 프로듀스 그룹의 성공을 멀리서 지켜봐야 하는 아이돌의 팬덤에게도 프로듀스 그룹의 성공은 곱게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레드오션이 된 시장의 이해관계가 집중되고 소용돌이치는 한복판이 <프로듀스>라는 방송이기도 했다. 아이돌 팬덤 문화의 정글과 같은 속성은 이 방송을 기점으로 한층 얼룩지고 참혹해졌다. <프로듀스>라는 방송이 영영 막을 내린다 해도, 이 망령이 보편적 팬덤 문화의 아비투스로 고착되지 않도록 떠나보내는 성찰의 씻김굿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솔직히 비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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