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한국 방송산업에서 비정규직 직군이 증가한 가장 큰 요인은 '방송산업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방송산업 비정규직 직종의 확대는 방송콘텐츠 생산과정에 있던 노동자의 지위를 재구성했고, 비정규직의 차별적 지위 인식을 불러 일으켰다.

송용한 성공회대 외래교수, 이종임 서울과학기술대 강사, 오현주 한국외대 강사는 최근 한양대 평화연구소가 발간하는 학술저널 '문화와 정치' 6권 4호에 실린 논문 <한국 방송산업의 구조적 변화에 따른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체성 구성에 관한 연구>에서 방송산업 비정규직 노동자 심층인터뷰 등을 바탕으로 방송산업 구조변화, 비정규직 조건변화와 직무경험·인식 등을 연구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연구자들은 지난 1991년 방송법에 따라 지상파 방송사에 대한 외주편성 비율이 법제화된 이후 외주제작시장 확대 추세와 함께 방송산업 노동시장은 내·외부로 이분화돼 있다고 봤다. 방송사 내부는 정규직 중심의 고용관행이 유지되는 반면, 방송사 외부 노동시장에는 비정규직 중심의 프로젝트형 고용관행이 형성돼 있다는 것이다. '프로젝트형' 생산구조는 방송사와 독립제작사 간 위계적 구조를 형성했고, 방송사 내부 정규직 연출직이 방송사 내·외부 비정규직과 제작사 인력을 실질적으로 지휘·관리하는 체계가 공고화 됐다.

연구자들은 "이와 같은 제작시스템의 변화는 외주제도 도입 이후 노동의 유연화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며 "주목할만한 점은 이러한 유연화에 대해 방송 관련 노동자들의 경험과 인식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연구자들은 "방송사 정규직 노동자도 불안을 느끼지만, 방송사 정규직을 제외한 다른 유형의 노동자들은 일상적인 고용불안뿐 아니라 그로 인해 파생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경험하고 있다"며 "이러한 경험은 노동 유연화를 통한 정규-비정규직 간의 계급관계 변화와 함께 노동조건 변화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대표적 사례로는 방송작가나 비정규직 연출PD 등 '프리랜서'들이 꼽힌다. 연구자들은 "이들은 방송사나 외주제작사와의 실질적 관계에서 종속적 노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아닌 프리랜서 형태로 분류되고 각종 노동 관련 법제도적 보호로부터 배제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아 노동법과 최저임금법 적용 대상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더 큰 문제는 계약직, 프리랜서 등 노동자의 비정규직 지위가 문제제기나 개선노력을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A씨는 "(어떤 분은)방송 일을 하면서 힘들다고, 신고라도 하자라고 말이 나왔지만 나올 때마다 '안 돼, 우리는 프리랜서야'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면서 "여러가지 법적 조건이 안 되는 것도 있었지만 선배나 후배들이 스스로 동료의 입을 막거나, 그분도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그럴 여건이 안되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노동법상 보호대상에서 배제돼 있기 때문에 주당 근로시간 제한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 B씨는 "얼마나 악랄하게 하냐하면, 일주일 중 3일을 20시간 일하고, 21시간 일하고, 그러니까 3~4일만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며 "문제는 이 안에서 계약형태가 다양한데, 막내 분들은 일급제로 거의 계약을 하고 하루 11~13만 원 받는다고 하면 10시간 일해도 12만원, 20시간을 일해도 12만원인데 일주일 노동시간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인터뷰 참여자들 대부분은 프리랜서라는 용어가 실제 비정규직 방송노동자 업무 내용이나 환경과 맞지 않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프리랜서'라는 용어가 지닌 사회적 분위기가 오히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와 노동환경을 개선시키지 못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노동자 C씨는 "이 일을 하면서 알게된 건데, 프리랜서가 아니라 초단기 근로자가 되는 거다. 단 한 번도 우리의 의견대로 스케줄이 조정된 적이 없다"며 "항상 위에서 아래로 지시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작업구조에서 일하는 사람을 프리랜서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털어놨다.

D씨는 "프리랜서라고 하면 원고를 만드는 자체가 자율적이어야 하는데 원고 쓰는 거 자체는 계속 논의하고 협의하고, 어떤 사람을 섭외하고 어떻게 구성을 하고 그게 PD랑 계속 얘기해야 하니까 작가의 업무가 독립적이지는 않다"고 밝혔다. E씨는 "'비정규직이라는 말을 써야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며 "실제 노동자들에게는 당연하게 되는 최저임금, 보험, 주휴수당, 휴가 등등이 프리랜서에게는 하나도 해당이 안 되고, 우리가 프리랜서라는 말에 갇혀 있다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2000년 전후를 기점으로 진행된 방송시장의 유연화 흐름에 따라 방송노동자들은 직장이 없는 활동을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됐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이들은 변화된 경제체제를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면서, '독립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었다"면서 "그러나 이들의 노동은 주체적인 노동자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기보다는 불안정하며 자기착취적인 현상이 강하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해석했다.

연구자들은 방송산업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위한 세 가지 정책적 제안을 내놨다. 이들은 우선 방송산업 비정규직 문제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해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연구자들은 "심층인터뷰를 통해 살펴본 정체성 분석 과정에서 비정규직은 정규직에 대해 차별적 지위를 인식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따라서 비정규직이 처한 위치와 노동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비정규직 문제를 정규직과 동일한 조건과 위치 속에서 접근하는 문제 해결 방식은 오히려 문제를 확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방송산업 노동시장은 내·외부 노동시장으로 분할된 이중노동시장 구조이고, 이 같은 구조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역할과 기능이 상반·충돌되는 만큼 비정규직의 지위와 노동조건을 고려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연구자들은 동일업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이더라도 해당 비정규직의 위치나 장르적 특성을 고려해 문제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예를 들어 작가의 경우 드라마, 예능, 시사/교양 작가들이 처한 상황이 다르고, 메인작가와 서브작가, 막내작가가 처한 노동조건이 달라 막내작가와 같은 최저기준을 우선적 개선 대상으로 삼고 문제를 단계적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연구자들은 방송콘텐츠 제작 특성상의 직무다양성을 고려한 문제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의사결정권을 가진 PD를 중심으로 작가, 카메라, 조명 등 다양한 직군의 인력들이 일하는 방송콘텐츠 제작 현장에서 각 비정규직 주체가 요구하는 조건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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