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얼마 전 아는 분이 아들네가 둘째를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시작은 축하였지만 결국은 '어떻게 해요'라며 걱정으로 마무리되었다. 매년 최저 출생률을 갱신하고 있는 시절, 하나라도 더 낳으면 좋은 일 아닌가 싶지만 현실은 혹독하다. 맞벌이 부부 집안, 그나마 좋은 직장을 다녀서 어린이집 혜택을 받는다지만 일찍 끝나는 어린이집 이후의 시간은 온전히 '할머니'의 몫이다. 아이를 돌보는 할머니가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또 다른 할머니가 그 대타를 하기 위해 서둘러 와야 하는 처지다. 할머니가 아프기라도 하면 완전 비상이다.

아이는 엄마가 낳지만 그 아이 하나를 기르기 위해 온 가족이 다 동원되어야 하는 현실. 그래도 육아를 도와줄 할머니가 있으니 낫다지만, 자식에 이어 손주까지 돌보는 할머니의 형편은 그리 녹록지 않다.

돌봄 공백을 몸으로 때우는 할머니

SBS 스페셜 '황혼육아 - 할머니의 전쟁' 편의 시작은 이제 60줄에 들어선 허정옥 씨네 집이다. 아침부터 일어나기 싫은 손주를 질질 끌다시피 이끌고 업고 하여 허정옥 씨가 출근한 곳은 같은 아파트 15층에 사는 큰딸네 집이다. 두 명 중 한 손주를 자신의 집에서 재운 정옥 씨, 손주를 데려다 놓으면 끝이 아니라 그때부터 그녀의 육아 전쟁이 시작된다.

SBS 스페셜 '황혼육아 - 할머니의 전쟁' 편

두 손주와 실랑이를 벌이는 딸 대신 그 집 식구들 아침 챙기기부터 시작된 정옥 씨의 아침. 아이들을 겨우 어린이집으로 보내고 어질러진 딸네 집안을 챙기는 것으로 마무리되는가 싶더니, 오후 4시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와 딸이 올 때까지 끝나지 않는 놀이지옥 속에서 할머니의 혼은 쏙 빠진다. 직장에서 돌아온 딸은 힘들다고 꼼짝하지 않고 그 대신 엄마인 할머니가 동분서주 바쁘다.

2016년 딸이 큰애를 낳으면서 시작된 황혼 육아. 딸은 경제적으로 도움을 드린다지만 할머니 입장에서는 자식 생각해서 해주는 일이지 돈 생각했으면 못할 일이라 고개를 내두른다. 이제는 제법 큰, 하지만 여전히 아기 같은 손주들을 번쩍번쩍 안고 업고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힘에 부쳐 약을 달고 산다. 병원에서는 오래도록 쓴 육체가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며 휴식을 요구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2018년도 육아정책연구소 보육실태조사에 따르면, 아이를 개인에게 맡기는 경우, 83.6%가 조부모라는 결과가 나왔다. 더구나 아이를 돌보는 조부모 열 명 중 한 명은 일주일에 7일 동안 아이를 돌보고 있는, 과도한 황혼 육아노동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 자식이 힘들까 참여하기 시작한 황혼 육아에서 조부모들, 특히 할머니들은 손목터널증후군, 관절염, 척추염 등 '손주병'을 얻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안은 없다. 여전히 오랜 시간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자식 세대에겐 맞벌이를 그만두거나 할머니에게 맡기거나 할 수밖에 없는 현실. 믿을 곳이 되어주어야 하는 조부모들의 처지는 녹록지 않다.

이에 전문가는 설사 믿고 맡기는 내 부모라 하더라도 과연 어디까지 맡길 것인지, 즉 시간이나 조건에 있어서 명확하게 ‘육아의 한계’를 약속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실제 이제 곧 둘째 출산을 앞둔 문미예 씨 집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온 가족이 육아에 참여한다. 아침 일찍 딸네 집으로 출근한 할아버지 문정기 씨가 오전 중에 손녀를 돌보면, 오후에 할머니가 와서 돌봄을 이어가는 식이다. 가족마다 2~6시간씩 시간을 나눠 '독박육아'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데 이런 이상적인 조건을 갖춘 가족들이 어디 쉽겠는가.

마음의 벽을 쌓는 황혼 육아

SBS 스페셜 '황혼육아 - 할머니의 전쟁' 편

하지만 아이 본 공은 없다고, 할머니의 황혼 육아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대구에서 김포로 9살 손자를 돌보러 오는 73세 곽정화 씨. 그런데 먼 길을 어렵게 온 할머니를 대하는 손주의 태도가 영 석연찮다. 하굣길에 반기는 할머니한테 대뜸 '왜 할머니야'라고 볼멘소리를 내놓고 하더니 집에 와서도 할머니한테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하지만 카메라에 비친 할머니도 만만치 않다. 꿀 먹은 벙어리 같은 손주에 대한 섭섭함을 피력하는 것도 잠시, 앉은 자세부터 연신 잔소리다. 며느리가 돌아오니 태세마저 전환하신다. 대놓고 큰며느리를 본받으라 한다던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음식 만들기에 남자아이들한테 웬 부엌일이냐며 핀잔이 끊이지 않는다. 결국 참다 못한 며느리는 방학을 핑계 대며 어머니가 이제 먼 길을 고생하며 오시지 않아도 된다 하고,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섭섭하다.

이렇게 막상 아쉬워서 부탁한 황혼 육아지만 집집마다 젊은 며느리 세대와 나이 든 할머니 세대의 육아방식의 갈등은 가족 내 위기를 조성한다.

69세 김복순 씨 역시 며느리의 부탁으로 함께 살며 아이를 키우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큰손주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할머니는 밥을 먹다 말고 라면을 먹고 싶다는 손주에게 라면을 끓여준다. 마트에 가서 장난감을 사고 싶다면 말리는 엄마한테 그게 얼마나 된다며 하며 손주 역성을 드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눈치가 빠른 아이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그런 관계에서 소외된 엄마는 자신이 귀찮은 큰누나가 된다며 상실감을 호소한다.

SBS 스페셜 '황혼육아 - 할머니의 전쟁' 편

실제 2015 보육 실태에 따르면, 황혼 육아를 하는 세대의 50%가 양육 방식의 차이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할머니와 엄마의 권한 사이에서 정작 피해를 보고 있는 건 아이들. 곽정화 씨의 9살 손자가 마음을 닫은 건 잔소리 많은 할머니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이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제아무리 할머니 세대에게 육아를 맡겨도 교육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건 부모 세대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디 전문가의 고언대로 될 수 있을까. <SBS 스페셜> 속 할머니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이해를 더하며 한 발 물러섰지만, 자기 자식들을 키우고 평생을 살아오며 '습'처럼 익혀진 삶의 방식에서 비롯된 조부모 세대의 사고방식이 쉽게 변화되는 건 쉽지 않다.

보육 시스템의 부재, 그런 가운데 기댈 곳은 부모님밖에 없는 현실. 하지만 정작 내 자식이 힘들까봐 시작한 황혼 육아에서 몸도 마음도 다쳐가는 부모님들.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가족의 문제로 치환시킨 현상은 명확한 문제에도 해결책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니 그 딜레마를 감수하고 굳이 아이를 낳을 필요가 있을까란 ‘최저 출산율’의 현실로 귀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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