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한국인의 문해력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걸까. 혹은 왜 그렇게 믿고 싶어 할까. 한국인 문해력이 심각한 수준이라는 주장은 이미 정설이 돼 버렸다. 이런 관념을 퍼트리고 다진 건 언론이다.

오래전에 한국인 문해력이 OECD 최하위라는 충격적 주장이 보도되었을뿐더러 (‘한국인 문서 해독능력 형편없다…OECD국중 최하위수준’ 동아일보, 2002.01.02.) 몇 년 전에도 “한국인 성인들의 실질적 문해율은 OECD 상위 22개국 중에서 최저 수준”이라는 기사가 나왔다(‘독서의 계절, 누가 많이 읽고 누가 안 읽나’ 경향신문, 2016.10.30.). 그리고 작년 SBS 스페셜 <난독 시대>가 방송되며 또 다시 문해력은 화두가 되었다. <난독 시대>는 한국인의 독서량과 문해력이 저조하다고 전하며, 학생들의 읽기 능력 저하가 심각하다는 일선 교육 종사자들의 증언을 인용한다. 만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3년마다 치르는 국제학력비교평가(PISA)에서 한국은 읽기 영역 순위 저하가 뚜렷하며 교과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독해력을 지닌 학생(레벨 2 수준 이하)이 32.9%라고 전한다.

통계를 살펴보면 꽤 다른 사실이 발견된다. 2016년 발행된 경향신문 기사에는 2004년 통계가 인용돼 있다(한국교육개발원(KEDI)의 ‘2004 한국 교육인적자원 지표’). 2013년 OECD가 발표한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에서 16~65세 한국인 평균 문해력은 최저 수준이 아니라 273점으로 OECD 평균이다. 한국과 유사한 문해력을 지닌 국가는 캐나다와 영국이다. 독일과 프랑스 같은 '서구 선진국가'는 한국보다 평균 문해력이 낮다. 특히 16~24세 한국인 문해력은 OECD 4위다.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 PISA를 보자. 작년 12월 발표된 PISA 2018년 조사에서 만 15세 한국 청소년 읽기 평균 점수는 OECD 국가 중 다섯 번째로 높다. OECD 평균 점수는 487점이고 한국은 514점이다. 에스토니아, 캐나다, 핀란드, 아일랜드를 제외한 유수의 OECD 국가 청소년 읽기 점수가 한국보다 아래에 있다. “그렇지만 읽기 점수가 계속 하락한다지 않소?”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한국의 읽기 점수는 2006년 556점에서 2018년 514점으로 하락했다. 하지만 순위는 여전히 상위권이다. OECD 회원국 읽기 점수 평균 역시 2015년 493점에서 2018년 487점으로 하락했다. 반면 한국은 동기간 517점에서 514점으로 하락폭이 더 적다.

사진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이번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교과서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학생이 32.9%나 된다고 하지 않소?” 32.9%라는 수치는 2015년 PISA 조사에서 읽기 능력 레벨 2 이하 학생 비율을 합산한 것과 동일한 수치다(레벨 1 미만부터 레벨 6까지 있고 높은 숫자로 갈수록 문해력이 우수하다). ‘OECD Multilingual Summaries PISA 2018 Results (Volume I) What Students Know and Can Do’라는 자료집에 의하면 레벨 2 이상의 읽기 능력은 “중간 길이의 텍스트에서 주요 주장을 파악할 수 있고, 때로는 복합적이지만 명시적 범주를 바탕으로 정보를 찾을 수 있으며, 명시적으로 지시를 받았을 때에 텍스트의 목적과 형식을 유추할 수 있다.”라고 설명된다. 레벨 2가 교과서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저조한 독해 능력이란 표현은 여기엔 없다. 그리고 2018년 PISA 조사에서 한국 청소년들의 레벨 2 이상 비율은 85.1%다. OECD 평균은 77%다.

한국 청소년들의 문해력이 하락하고 있다고 우려하는 건 적어도 통계상으론 과장된 부분이 있다. 또한 한국에서 수행하는 읽기 시험 방식과 근래 PISA가 교체한 시험 방식은 서로 성격이 다른데, 읽기 점수 하락세가 여기에서 기인하는 문제일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 부분을 논외한다고 쳐도 한국 청소년들의 문해력은 대다수 국가들에 비해 오히려 높다. 그것이 통계적 사실이다.

한국인 문해력에 문제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은 젊은 세대의 문해력은 높지만 55세~65세의 문해력은 아주 낮다. 고로 세대 간 문해력 격차가 가장 큰 나라다. 그 결과 문해력 평균 OECD 중위권이란 점수가 나온 것인데, 세대 간 문해력 간극을 지적한다면 유의미한 사회비평으로 이어질 수 있겠으나, ‘한국인 문해력이 낮다’고 말한다면 부정확한 명제다. 이 주제에 관해 언론 기사 여러 편을 살펴보았지만, 특정한 방향으로 통계를 해석하는 관성이 작용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문해력에 관한 문제를 구체적으로 진단해야

작년 7월 중앙일보에서 발행된 오피니언 칼럼 ‘"이동진 어려운 말, 잘난 체" 기생충 평 논란···심각한 韓문해력’에서는 이상 살펴본 통계의 개요를 비교적 정확히 짚고 있다. 하지만 PISA 읽기 능력 순위가 “2006년엔 전체 참여국 중 1위였으나, 2009년에는 2~4위, 2012년에는 3~5위, 2015년에는 4~9위로 추락했다”며 “국가적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방치하는 사이, 인적 역량의 기초가 무너지는 중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PIAAC 상으로 “16~24세 청년들은 PISA와 비슷한 세계 4위다. 25세를 기점으로 내리막을 타는데, 35~44세엔 평균 아래로 내려가고, 45세 이후엔 하위권으로 떨어지며, 55~65세의 경우엔 최하위에 해당한다.”며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PISA 순위가 하락세라고 해도 여전히 OECD 평균보다 27점 높은 점수를 두고 “인적 역량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고까지 표현하는 게 타당할지 의문이 든다. PIAAC에서 한국인 35~44세 점수는 277.55이고 OECD 평균은 278.94인데 이 정도 차이는 의미가 없어 보이며, 35~44세에서 평균 아래로 내려간다는 말이 틀리진 않지만 평균과 비슷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16~65세 조사 대상 중 16~44세의 문해력이 OECD 평균 이상 인 셈이다.

2017년엔 머니투데이에서 ‘"읽어도 이해 안 돼" 낫 놓고 기역자 모르는 사람들’이란 기사가 나왔다. PIAAC에서 한국 16~65세 언어능력 수준이 평균(3 수준) 이하가 91.5%로 나타났다는 주장이다(1 수준 이하에서 5 수준까지 있고 숫자가 높을수록 역량도 높다). 하지만 PIAAC에서 정의하는 4,5 수준의 읽기 능력은 복잡한 지문 독해를 요구하는 스킬이다. 대부분의 조사 대상 국가에서 10% 내외를 차지하는 최상위 집단이기 때문에 3 수준을 평균으로 잡는 건 적절하지 않다. 실제로 한국 정부가 PIAAC를 해석하고 정리한 보고서(『한국인의 역량, 학습과 일』)에서는 "상위 수준(3,4,5 수준)에 속하는 성인의 비율이 OECD는 50%이며, 한국은 49.8%로 거의 평균 수준이다."라고 평가한다. 만약 저 기사의 제목과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 뿐 아니라 OECD 가입국 대부분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실질적 문맹자가 8~90%나 있는 셈이다.

어떤 일선 교강사들은 학생들의 읽기 능력 상태가 심각하다고 증언한다. 이건 고유한 체험으로 얻는 생각일 테니 진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나라든지 글을 이해하는 지적 능력이 빼어난 사람은 적기 마련이라는 이치도 상기해 보는 건 어떨까. 한국에는 인문학적 논술이 포함돼 학생들의 사유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프랑스 입시제도 '바칼로레아'를 찬미하며 한국의 주입식 교육을 지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는 한국보다 문해력 순위가 몇 단계는 낮은 나라고, 15~24세에서는 차이가 더 크다. 온라인 문화가 확대되며 생긴 긴 글을 거르는 풍속이 문해력에 미치는 악영향을 근심하는 의견이 많은데, 재미있게도 영미권 역시 tl;dr(too long; didn't read)이라는 온라인 신조어가 있다고 한다([Opinion] 깊이 읽기가 필요한 시대 - 다시 책으로 [도서], 아트인사이트, 2019.07.09.).

한편으론 세대 간 문해력 격차를 들어 “대학 입학까지 죽어라 공부하고, 이후엔 배울 이유가 없는 사회에서 가장 똑똑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멍청한 어른이 되어간다.”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경향의 눈]수능이 대체 뭐라고’ 경향신문, 2019.11.13.) 이런 생각은 동일 시점에서 조사한 세대별 현황을 단일한 개체의 생애주기적 흐름처럼 엮는 오류다. 문해력 좋은 청소년이 나이를 먹으며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장 조건과 대학 진학률을 겪은 세대들의 문해력이 그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다.

통계가 모든 진실을 담는 물건은 아니다. 지금껏 살펴본 PISA와 PIAAC 통계상으로도 한국인 문해력에 시비를 걸어 볼 대목은 있다. 세대 간 문해력 격차는 한국이 초고령화 사회로 향해 가는 터널에서 결코 간과할 대목이 아니다. 세대 간 소통 단절과 갈등 현상의 거름이 될 수 있는 건 물론 노년층의 미디어 이용 능력과 정보 이해 능력에서 문제를 빚을 수 있다. 앞서 거론한 기사들은 대체로 한국인의 부족한 독서량을 지적하며 문해력과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 주장하거나 늘어나는 스마트폰 매체 사용률과 문해력의 연관성을 질문하는데 이 자체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추론이다. 현재는 젊은 세대 문해력과 전체 세대의 문해력 평균이 나쁘지 않지만,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혹은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는 과장이나 치우침 없이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쟁점을 찾고 접근해야 합당한 해결책이 나온다. “한국인 문해력은 나쁘다”는 프레임은 도리어 문제의 구체성을 덮어 버리는 단순화된 명제다.

정말 문제는 문해력일까

PIAAC에는 문해력과 별개로 재미있는 대목이 있다. 한국인은 조사된 역량 중 문해력이 가장 높고, 수리력과 컴퓨터 사용능력은 오히려 조금 쳐진다. 하지만 "한국인은 수학을 못해서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 다들 그렇게 문해력만 근심하는 걸까. 아닌 게 아니라 한국인의 문해력을 비판하는 기사는 발행될 때마다 번번이 반향을 일으키며 공유된다. 문해력이 "우리나라는 소통이 문제"라거나 "우리 국민은 ‘민도’가 낮다"거나 "왜 이렇게 내 주위엔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같은 불만을 뒷받침해 주는 테마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는 걸까? 어쩌면 '나' 혹은 '우리'를 뺀 타인과 세상을 향해 내가 겪는 불만의 책임을 묻고 싶은 심리가 있는 건 아닐까.

어떤 주장의 요점을 이해한다는 것과 그 주장에 동의한다는 것은 판이한 상태다. 아무리 옳은 주장을 해도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내 기대보다 작을 수 있다. 그건 그에게 말과 글을 이해할 능력이 있고 없고와 별개다. 소통은 원래 도달하기 힘든 목표다. 그런 어찌할 길 없는 한계를 인정하고, 그럼에도 나와 ‘말’이 통하지 않는 주체들과 소통하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것. 문해력 배양을 떠나 이런 지향을 공유하는 노력이 필요하진 않을까? 나아가서, 사회의 문해력이 낮다면 '이해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당면 목표가 되겠지만, 그것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지금의 사회 문제를 만든 것이 이해력의 결핍만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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