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혜인 기자] “지금은 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법이 있어도 아이들의 보호망이 되지 못하고 있다” 2년 전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아동·청소년 배우들의 열악한 노동 실태를 알리는 데 앞장섰던 배우 허정도 씨는 2020년에도 이같이 말했다.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관련 법안이 마련되고 인권 보호 조항이 명시된 표준부속계약서가 있지만 강제성이 없어 법이 제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현장에서 법이 제대로 적용되는지를 감시하는 감시관이 도입돼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14일 '아동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 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모습. (사진=미디어스)

14일 오후 국회에서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는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과 김영주·노웅래·민병두·우상호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 주최했다.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팝업 공동행동)은 2018년 12월 19일 결성됐다. 아역 배우, 아이돌, 연습생 등 아동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전반의 노동인권 개선을 위해 모인 조직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아동인권위원회, 민주언론시민연합,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 10개 단체가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을 위한 실태조사, 캠페인, 간담회 등의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다.

이날 열린 토론회에서는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의 허점이 주로 지적됐다. 선언적인 내용으로 현장에서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허정도 배우는 여는 말에서 “법이 있어도 아역배우, 인솔자들, 부모, 소속사 관계자들이 인권 보호를 요구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지금 법은 없는 것과 같다. 아동 인권보호 감독관이 꼭 현장에 나가야한다”고 현실적인 개선책 마련의 필요성을 주문했다.

팝업 공동행동이 지난해 5월 13일부터 6월 30일까지 104명의 아동·청소년 연기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드라마 출연 시 계약을 맺었냐는 질문에 ‘잘 모른다’는 답이 가장 많은 응답률(29.13%)로 나타났다. ‘제작사 및 방송사가 제시한 문서에 따른다’(23.30%), ‘출연료지급기준표인 등급계약에 따라 계약했다’(10.68%)등의 답이 뒤를 이었다.

드라마 현장의 노동시간은 ‘12시간 이상~18시간 미만’(36.89%) 응답률이 가장 높았고 ‘6시간 이상~12시간 미만’(22.33%), ‘18시간 이상~24시간 미만’(21.36%)순으로 나타났다. 강도 높은 야간촬영의 경우 전체 응답자 가운데 ‘야간촬영에 참여해봤다’는 응답이 68.96%였다. 또한 야간촬영 진행 시 절반 이상이 ‘특별한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이 꼽은 촬영장 인권침해 축소 대책은 ‘엄격한 법적 조치’나 ‘피해 사례 신고센터 설치’가 아닌 ‘아동·청소년 연기자 보호를 위한 전담 감독관 파견제도’였다.

김두나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 있지만 선언적 의미만 가질 뿐 실효성 있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아동·청소년 예술인들이 맺는 대중문화예술용역제공계약이나 대중문화예술기획업무계약은 근로계약으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아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 2014년 아동 청소년예술인들의 용역제공시간 제한, 기본권 보장 등을 규정한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하 대중문화산업법)이 도입됐지만, 제도적 기초마련 역할에 머물렀다는 평가다.

대중문화산업법에는 아동·청소년 용역제공시간을 15세 기준으로 나눠서 제한을 두고 있다. 그러나 위반행위에 대해 별도의 제재규정이 없고 적발도 어려워 실질적으로 작동이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이 법은 15세 미만/이상을 기준으로 삼는데 영·유아부터 미취학 아동, 취학 중인 아동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돼 연령별 특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3월 대중문화산업법에 기초해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전속계약서와 부속합의서를 제정해 고시했지만 해당 계약서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관련 조항을 계약에 포함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김두나 변호사는 “구체적인 기준이나 방안이 모호하고 위반행위에 따른 별도의 제재 방안이 없다는 한계가 있어 개선이 시급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대중문화산업법에 용역제공시간을 세분화해야 하고 위반시 제재 규정 마련이 중요하다”며 “건강권 보장을 위한 책임을 사업장에 부여해야 하고 아동 청소년 권익 침해 금지를 위한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동인권 보호를 위해서는 관리 감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외국의 경우 아동의 발달 단계, 취학 여부, 학기 중인지 여부에 따라 노동시간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생후 15일~6개월 미만, 6개월~2세 미만 등 연령대별 휴식시간을 설정했다. 학습권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작품 출연시 학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조항(미국 캘리포니아주, 영국, 프랑스)이 존재한다.

아동·청소년 예술인들이 대책으로 꼽고 있는 ‘전담 감독관 파견 제도'는 외국에서 이미 시행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은 아동 청소년 연기자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샤프롱(Chaperones)이 존재한다. 아동 청소년의 연기 시간이 허용된 시간을 넘지 않게 관리하고 식사와 휴식이 적절히 제공되는지 기록하고 살핀다. 가이드라인을 벗어나는 일이 아동 청소년에게 벌어지면 지방 당국에 알려 조치를 취한다.

박희아 대중문화평론가는 “보호감독관제도가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라며 “아이돌 산업에서 신인개발팀 부서의 역할이 굉장히 큰데 이들에게 ‘아동·청소년 인권’에 대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꾸준히 해왔다. 제도와 결부시켜 법안으로 만들면 효율적인 개선방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토로회에 참석한 정부부처 관계자들은 강제성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이재인 고용노동부 근로기준정책과 사무관은 “근로기준법을 적용받기 위해서는 근로자성을 인정 받는게 관건인데 대중문화예술인들은 활동 양태를 봤을 때 근로자성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며 “그러다 보니 법이 있어도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활동을 보호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나금륜 방송통신위원회 방송기반총괄과 사무관은 “방통위는 아동 청소년이 흡연이나 음주 장면을 묘사하지 못하도록 방송 내용의 범위를 넓혀 심의하고 있지만 내용 중점으로 제작 과정에서의 관리는 미흡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올해 방통위 목표는 아동·청소년을 보호할 수 있는 방송사 간에 통일된 제작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영 문화체육관광부 대중문화산업과 주무관은 “표준계약서 제정이나 표준부속합의서를 제작하고 심리상담도 제공하고 있지만 개선해 나가야 할 길이 멀다고 보고 개정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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