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21대 총선 출마 의지를 밝힌 천영식 KBS 이사의 사표가 수리됐다. 자유한국당 추천으로 KBS 이사직에 오른 천 이사의 정계 진출 행보와 이에 따른 KBS 이사 공석이 현실화됐다. 자유한국당의 보궐이사 추천이 전망된다. 문제는 이러한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 국회가 약속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법안 논의가 실종된 상태라는 점이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9일 사표를 낸 천영식 KBS 이사에 대해 임면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14일 천 이사 면직안을 재가했다.

앞서 천 이사는 재임 1년여 만에 대구 동구갑 지역 출마 의사를 밝혔다. 2018년 8월부터 KBS 이사 임기를 시작한 천 이사는 지난해 12월 3일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출마를 공식화했다.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지난해 8월 이전부터 대구 동구갑 지역 출마자로 천 이사가 언급되고 있었다.

아주경제 2019년 12월 3일 <'박근헤 정부 마지막 비서관' 천영식 "의리·책임의 정치할 것"> (아주경제 홈페이지 갈무리)

천 이사는 자유한국당 추천으로 이사직에 올랐다. KBS 이사는 방송법에 따라 방송통신위원회가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다. 하지만 정치권 여야가 각각 일정 비율로 이사 후보를 추천하는 것이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공영방송 이사회의 정치적 독립성은 교체기마다 도마위에 올랐다.

천 이사의 출마가 공식화되자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성명을 내어 공영방송 지배구조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언론노조 KBS본부는 "예비 정치인, 천 이사가 특정 정치세력의 이해와 KBS의 이익 어느 것을 중시하며 이사회 활동을 했을지 생각해보면 심각하다"며 "천 이사에게 KBS는 정치적 거래 밑천을 다지고 경력을 쌓으며, 임직원에게 큰소리를 칠 수 있는 놀이터였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언론노조 KBS본부는 "천 이사의 정치 참여는 이사 선임 절차를 개선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며 "법적 근거 없이 방송통신위원회가 관행적으로 정당 추천으로 KBS 이사를 결정하는 현재 구조로는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이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천 이사는 사표를 낸 직후인 지난 10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출마의 변' 성격의 글을 게재하며 KBS 이사로서의 이력을 주요 경력으로 제시했다. 'KBS 이사를 그만두고 다시 광야에 서며'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천 이사는 "2018년 9월 자유한국당 추천으로 KBS 이사가 되었다"며 <오늘밤 김제동> 폐지, 소수이사 성명운동 등을 자신의 성과로 내세웠다.

천 이사의 사표가 수리되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KBS 보궐이사를 임명해야 한다. '관행'대로라면 자유한국당은 KBS 이사 추천권을 요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천 이사 임명과 면직 과정에서 발생한 공영방송 이사 정치적 독립성 문제가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KBS·MBC·EBS 등 공영방송 3사 사옥

공영방송 지배구조 문제는 지난해 20대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 해결될 조짐을 보였지만 사실상 논의가 무산된 상태다. 13일 검경수사권 조정법안과 유치원 3법 등의 처리로 국회 '패스트트랙' 정국이 마무리되고, 총선 국면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20대 국회 내에 관련 논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2018년 12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 여야는 2019년 2월 임시국회까지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관련 방송법 개정안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과방위 법안소위에 오른 관련법은 모두 18건, 이 중 이른바 '언론장악방지법'으로 불리는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안을 중심으로 국회 심사 논의가 이뤄졌다.

'박홍근안'은 2016년 박홍근 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으로 공영방송 이사 구성에 있어 여야 7대6 비율로 이사진을 구성하고, 사장 추천 시 이사회 3분의 2 이상의 동의를 얻도록 하는 '특별다수제'를 도입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부개입이 만연했던 과거 보수정권 시절, 언론장악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차악'책으로 발의됐던 법안이다.

하지만 '관행'인 정치권의 공영방송 이사추천 몫을 법에 명시한다는 점에서 문재인 정부 들어 언론시민사회, 공영방송 구성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전 정부에서 '박홍근안'을 반대했던 자유한국당은 입장을 바꿔 이를 당론으로 고수하는 상황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노웅래 위원장(가운데)과 여야 간사. (사진=연합뉴스)

이에 추혜선 정의당 의원, 이재정 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들이 시민사회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추 의원 발의안은 공영방송 이사의 수를 13명으로 늘리고, 시민 200명이 참여하는 '이사추천국민위원회'를 구성해 공영방송 이사를 시민이 직접 뽑게 하는 내용이 골자다. 이 의원 발의안은 공영방송 이사를 9명으로 줄이는 대신 이사회 3분의 1 이상을 공영방송 구성원과 방송 관련 학계가 추천하는 사람으로 구성하고, 사장 선출시 사장후보자 추천을 위해 100명 이상의 '사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내용이다.

주무부처인 방통위도 안을 내놨다. 공영방송 이사 수를 13명으로 늘리고 이 중 3분의 1 이상 또는 일정 수 이상을 국민의견을 수렴해 방통위 상임위원 전원합의로 선임하도록 하는 안이다. '국민추천이사제'를 통해 공영방송 이사회 내 '중립지대'를 형성, 정치적 후견주의를 완화하겠다는 구상이 주요 골자다. 현행 제도보다는 진일보한 내용이지만 정치적 후견주의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시민사회 평가가 나온 바 있다.

그러나 국회 법안논의는 사실상 실종됐다. 정치권, 각계 입장차이가 크고 패스트트랙 정국 등 국회가 공전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관련 법 논의는 2019년 2월 처리 합의 시한을 넘긴 채 사라졌다.

다만, 20대 국회에서 관련법이 처리되지 않았다고 해도 주무부처인 방통위가 관행을 거부하고 방송법에 명시돼 있는 자신의 권한을 있는 그대로 행사하면 보궐이사 선임에는 문제가 없다.

최정기 전국언론노동조합 정책실장은 "사실상 여야를 막론하고 20대 국회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서로 중요하다고 얘기했음에도 어떤 논의 진전도 없었다"면서 "누차 강조했지만 법개정 이전에라도 방통위가 행정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부분들은 시대정신에 따라 충분히 개선이 가능하다. 적극적인 개선 노력이 필요하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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