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후 인사 불이익을 준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돼 1·2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안태근 전 검찰국장에 대해 9일 대법원이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1·2심 판결을 뒤집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서 여야 정치권과 언론 등에서는 사법농단, 조국 전 민정수석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그리고 최근 추미애 법무장관의 검찰인사 관련 논란까지 연결지은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같은 혐의라도 각 사건의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정치적 해석이 안 전 국장 사건의 본질인 '성추행'과 '인사보복'을 덮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서지현 검사를 성추행한 후 인사보복을 한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았다가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의 판결을 받은 안태근 전 검사장이 9일 오후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대법원 직권으로 보석결정을 받아 석방돼 나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안 전 국장 사건의 쟁점은 '직권남용'에 대한 범위 해석이었다. 대법원은 1·2심 재판부와 달리 안 전 국장이 경력검사인 서 검사를 연속으로 부치지청(차장검사 없이 부장검사만 있는 소규모지청)에 보낸 것이 검찰 인사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경력검사 부치지청 배치제도'는 3개청 이상 근무한 경력검사가 작은 규모의 부치지청에서 높은 강도로 근무하고 나면 다음 인사 때 가고 싶은 곳으로 보내는 것을 적극 검토, 보상하는 인사 원칙을 말한다. 안 전 국장은 2015년 수원지검 여주지청에서 근무하던 서 검사를 창원지검 통영지청으로 보내는 인사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1·2심 재판부는 경력검사 부치지정 배치제도 시행 이후 서 검사와 같은 인사조치는 단 한번도 없었다고 판단했지만, 대법원은 해당 제도를 절대적 인사기준으로 볼 수 없다며 안 전 국장의 인사재량권을 폭넓게 인정했다.

이 같은 안 전 국장에 대한 대법원 판결 전후로 세간에서는 추미애 법무장관 검찰인사를 중심으로 한 법리적 해석이 일었다. 대표적으로 조선일보 보도와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의원의 발언을 꼽을 수 있다.

조선일보 1월 9일 <'서지현 좌천인사' 안태근은 유죄… 같은 논리면 이번 인사도 직권남용>

조선일보는 9일 <'서지현 좌천인사' 안태근은 유죄… 같은 논리면 이번 인사도 직권남용>기사에서 추 법무장관 검찰인사에 대한 직권남용죄 처벌 가능성이 법조계를 중심으로 일고 있다며 "발표된 인사 내용은 안 전 국장 사안보다 심각하다는 게 법조계 중론"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조선일보는 청와대와 관련한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 '울산시장 선거개입' 의혹,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 의혹 등 '직권남용' 혐의 사건들을 나열했다.

다른 한편 판사 출신인 민주당 박범계 의원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자신의 SNS계정에 "참 미묘한데, 어찌되었든 인사권 행사에 직권남용죄를 적용하는 것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낸 것으로 보인다"며 "추미애 법무장관 인사제청을 놓고 고발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불가능"이라고 적었다. 자유한국당이 검찰 인사와 관련해 추 법무장관을 직권남용·업무집행방해 등의 혐의로 형사고발하겠다고 나서자, 추 법무장관 인사에는 문제가 없다는 논리를 안 전 국장 사건 대법원 판결로 세운 것이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 9일 트위터 게시물

이른바 '적폐청산' 수사부터 최근 청와대 관련 의혹 수사에 이르기까지 '직권남용' 혐의의 적용이 쟁점화되어 있는 만큼 안 전 국장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다른 사건에 미칠 영향이 관심거리로 떠오른 건 사실이다. 하지만 각 사안의 성격이 다른 만큼 영향이 적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경향신문은 10일 <'직권남용' 사법농단·조국 재판에도 영향 미칠까>기사에서 사법농단 사건에 대해 "판사와 검사에 대한 인사권자의 재량 범위, 확립된 인사 기준과 원칙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안 전 검사장 사건을 바로 적용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조 전 장관 '유재수 감찰무마' 의혹 사건에 대해서는 "안 전 검사장은 '인사' 문제였지만, 조 전 장관은 '감찰' 문제였다"고 차이를 뒀다.

한겨레는 같은 날 관련 보도에서 "법관과 검사의 인사 원칙은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대법원 판결을 사법농단의 인사 불이익 의혹과 맞비교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온다"며 "또 양 전 대법원장이 위반한 '초임 부장 지방법원 배치' 원칙은 명시적 인사 기준으로 특정 판사에게 불이익을 주려한 의도가 문건으로 남아 있는 데 반해, 이번 사건에서 문제가 된 '경력검사 부치지청 배치제도'는 다양한 인사 기준 가운데 하나로 판단한 점이 다르다"고 분석했다.

김범수 한국일보 논설위원은 칼럼 <인사와 직권남용>에서 '직권남용' 판단이 쉽지 않다는 점을 언급하며 "마침 전날 법무부의 검사장 인사가 구설에 오르고 있다. 하지만 판례에 비추어 이 인사가 법적으로 문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며 "6개월 전 당시 조국 전 민정수석과 윤석열 총장이 조율했다는 검사장 인사에 대해 '윤석열 사단 일색'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던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번 인사에 끓어오를 줄 알았던 검찰이 생각보다 잠잠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고 썼다.

안 전 국장 사건의 본질인 '성범죄'가 이번 대법원 판결로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당부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겨레는 사설 <안태근 파기환송, '성폭력' 면죄부일 수는 없다>에서 "이런 사례가 검찰 인사 역사에 유일무이했던 점, 통영지청에 미리 내정됐던 다른 검사에게만 전보 의견을 물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직권남용 혐의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한 판단이 아닌가 싶다"면서 "'직권남용' 혐의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성범죄'에 대한 면죄부로 받아들여지거나 #미투에 대한 폄훼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사설 <안태근 직권남용 무죄 판결, 성추행 본질은 흔들릴 수 없다>에서 "대법원은 안 전 감사장의 성추행 행위, 서 검사의 인사 불이익 등에 대한 하급심 판단은 유지했다"며 "이 사건의 본질은 안 전 검사장의 성추행과 그에 따른 인사보복이다. 이런 진실마저 흔들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한편, 서 검사는 "직권남용죄의 '직권'에 '재량'을 넓혀 '남용'을 매우 협소하게 판단하였는데, 도저히 납득이 어렵다"며 대법원 판결을 비판했다. 서 검사는 9일 자신의 SNS계정에 글을 올려 "피해자에 대한 유례없는 인사발령으로 한 인사보복을 '재량'이라니"라며 "경력검사를 곧바로 부치지청에 배치한 것은 제도 시행 후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이례적이면서 인사대상자에게 충격적이고 가혹한 것으로 실제 인사 직후 서 검사는 사직을 표명했다"는 1심 판결문의 일부 내용을 소개했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이번 대법원 판결을 규탄했다. 여성민우회는 "검찰로부터 시작되는 거대한 폭력의 용인과 힘의 논리를 거부한다. 이를 승인하는 대법원의 무력함과 이에 편승하는 대법원의 불의함에 분노한다"며 이어질 파기 환송심에서의 제대로 된 심리와 판결을 진행할 것을 법원에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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