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90년대를 살았지만 양준일을 몰랐던 사람은 많을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는 가요계에 데뷔한 90년대에 무명이었으니까 말이다. 중장년 유저가 많이 이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검색을 해 보면 “저런 사람이 있는지 몰랐다” “노래는 들어 본 것 같다”는 삼사십 대가 드물지 않다. 삼십 년 동안 세상의 기억 저편으로 소실돼있던 양준일이 어떻게 ‘신드롬’이 돼 돌아왔는지 퀴즈를 풀 수 있는 실마리다.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양준일은 한국에 건너와 1990년도에 ‘리베카’란 노래로 데뷔했다. 그의 디스코그래피엔 두 장의 앨범이 더 기록돼 있지만, 인기를 얻지 못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까마득히 세월이 흘러 2018년 유튜브를 통해 그의 과거 무대 영상이 주목받았고, SBS ‘인기가요’ 예전 방영분을 틀어주는 ‘SBS K-POP CLASSIC’ 유튜브 채널, 속칭 ‘온라인 탑골 공원’을 통해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지드래곤을 연상케 하는 얼굴, 늘씬한 비율, 감각 있는 패션 스타일, 지금 들어도 흥겨운 음악으로 놀라움을 주며 ‘탑골 지디’라 불렸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 이곳에 도착했지만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비운의 ‘시간 여행자’, 그것이 양준일을 수식하는 말이다.

가수 양준일이 지난 12월 31일 오후 서울 광진구 세종대 대양홀에서 열린 팬미팅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실은 양준일의 음악이 그렇게 시대를 앞서간 건 아니다. 당시 ‘리베카’ 무대를 보면 대뜸 떠오르는 레퍼런스가 많다. 춤과 패션은 마이클 잭슨을 닮았고, 사운드와 멜로디 역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뉴 잭 스윙 계열이다. 90년대 초반 가요계엔 정적인 리듬의 보컬 트랙이 많았지만, 빌보드에서 영향을 받은 팝 스타일 댄스곡이 가요계 주류로 진입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89년엔 나미가 ‘인디안 인형처럼’을, 90년도엔 현진영이 ‘슬픈 마네킹’을, 80년대부터 댄스 가수로 활동한 김완선도 90년도에 ‘삐에로는 우릴 보며 웃지’를 발표했다. 심지어 89년도엔 벌스가 랩으로만 채워진 홍서범의 ‘김삿갓’이 나왔다. 이 노래는 한국에 힙합 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랩은 물론 사운드까지 80년대 미국 올드스쿨 힙합의 양식을 가져왔었다. 92년 93년으로 가면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가 좀 더 강렬한 랩 댄스 곡, 흑인 음악을 들고 나왔다.

물론 양준일은 이런 물결의 들머리에서 등장한 인물 중 하나다. 따라서 그가 시대의 흐름에 투신했던 자취를 재발견하는 건 타당하겠지만, 그가 혼자서 시대를 앞서갔다고 하기엔 다른 뮤지션들의 족적이 뚜렷하다. 월경된 것은 시대라기보다 국경이었고, 당대 대중의 접근이 제한돼 있던 빌보드 음악을 먼저 선보인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는 양준일뿐 아니라 미국 교포 출신 뮤지션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에 희소한 장르 음악을 선보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바비킴은 93년 그룹 닥터 레게로 데뷔해 레게음악을 표방했고, 타이거 JK 역시 92년에 자니윤 쇼에 출연했으며 95년엔 솔로로 힙합 앨범을 냈지만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홀딱 망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다. 양준일의 노래 ‘리베카’는 시대적 상황의 예외였다기보다 시대적 조류를 구성하는 한 역할을 맡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80년대 이후 문화적 개방과 자율화가 진행되고 해외 상업 문화의 물살이 밀려오던 시기, 오래된 타입의 문화 및 생활양식과 새로운 타입의 그것이 공존하며 교체되던 과도기를 일찍 찾아온 사람 중 하나였다.

90년대는 그만큼 현행 대중문화와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 영위되는 대중문화의 기본 포맷이 수입되고 자리 잡힌 시기였고, 201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복고 패션이 유행해 현재는 메인스트림으로 정착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90년대를 직접 보지 못한 세대, 일이십 대가 우연히 유튜브에서 양준일을 보았을 때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강한 기시감을 느끼는 건 자연스럽다. 90년대를 겪은 세대는 그 시절이 그랬다는 기억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세대는 훨씬 신선한 체험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양준일이 아직까지 방송에서 활동하거나 후일담이 공유될 만큼 인기를 얻은 90년대 연예인이 아니라, 이름이 전혀 구전되지 않는 인물이기에 미지의 대상을 발견한 감흥은 더 컸을 것 같다. 마치 정말로 ‘시간여행자’를 발견한 것처럼. 이렇듯 젊은 세대가 얻은 신선한 충격이 오래된 세대가 느끼는 향수와 스미며 그것을 배가해 양준일이 더 큰 화젯거리로 회자된 건 아닐까. 물론 세월의 커다란 간격을 무색하게 하는 양준일 자신의 고유한 매력 역시 있기에 이만큼 화제가 되었을 것도 같다.

[인터뷰] 양준일 "앵커브리핑 보고 눈물…대한민국에 고마워" (JTBC <뉴스룸> 보도화면 갈무리)

이런 체험을 가능하게 한 건 유튜브의 매체성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레거시 미디어’라고 불리는 올드 미디어, 지상파 TV는 시청자들에게 열람 가능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지 않는다. 유튜브는 개설된 지 15년이 지나며 국경과 세월을 망라하는 온갖 조각 영상이 축적된 거대한 스트리밍 박물관이 되었다. 당대엔 주목받지 못한 인물 혹은 영상이라도 어떤 계기가 갖춰진다면 사후적으로 발굴될 수 있다. 이 거대한 박물관이 영상 매체의 메카가 되어 가는 시대에, 공중파 역시 유튜브에 뛰어들어 자신이 지닌 독점적 데이터베이스를 풀고 있다. ‘SBS K-POP CLASSIC’ 유튜브 채널은 예전 ‘인기 가요’ 방영분을 실시간으로 틀어주는 라이브 스트리밍을 진행한다. 동시대 유튜브 이용자들은 90년대 시청자들과 흡사한 시청 상태, 그 시절의 일상적 방송물 한 편 한 편을 시작부터 끝까지 티브이 시청을 하듯 보는 일상적 경험을 한다. 그들은 2019년을 사는 사람의 경험과 지식, 인지 상태를 기반에 두고 과거를 유사 체험하며 구경하고 평가했다. 그렇기에 당시엔 주목받지 못한 인물을 ‘현재’의 눈초리로 주목하고 건져냈다. 양준일이 시간 여행자일 수도 있지만, 동시대 네티즌들이 유튜브란 ‘돈데크만’을 작동해 90년대란 ‘이세계’로 시간 여행을 한 것에 가까운 상황이다.

양준일의 인기는 JTBC ‘슈가맨’과 ‘뉴스룸’에 출연하며 확장되고 증폭되었다. 유튜브에서 최초로 ‘발견’되고, 지상파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로 인기를 얻고, 그것이 SNS를 타고 입소문이 나고, 종편 채널이 운영하는 예능 방송과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신드롬’이 완성됐다.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의 주고받기가 톱니바퀴처럼 작동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과거는 물론 현재에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던 인물을 발굴해 ‘현상’으로 만든 사례다. 이 현상은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가 공존하는 시대에 어떤 교본으로 남아 미디어 교과서에 사례로 등재될 만하다.

양준일의 인기는 최종적으로 두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역사는 위업으로 이름을 남긴 대문자 주체들의 서사다. 하지만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연예계의 무명씨를 소환해 그를 통해 과거를 상기하고 가요사의 페이지를 재구성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 과정이 위로부터의 기획이 아니라 유튜브 이용자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으로 이뤄졌음을 특기해야 한다. 또한 심화돼 가는 고령화 사회는 대중문화 역시 임계점을 넘어 재편하고 있다. 얼마 전 치러진 양준일 팬 미팅 참가자는 40대가 가장 많았고 그 외 다양한 세대가 있었다고 한다. 팬들은 양준일의 입국을 맞아 그의 이름을 실시간 검색어에 올리고, 팬미팅에 쌀 화환을 보내는 등 케이팝 아이돌 팬 문화를 실천하며 즐겼다. 90년대 후반에 데뷔한 아이돌 그룹과 팬들이 40대를 넘어가며 함께 나이를 먹고, <프로듀스> 시즌2로 데뷔한 젊은 아이돌 그룹에 40대 팬들이 열광하는 걸 넘어, 사상 초유의 50대 아이돌이 나타났다. 40대 팬덤은 이미 아이돌 팬덤 시장의 주요 고객이 된 상태이며, 이제 그들에게 새로운 타입의 아이돌이 주어진 것이다. 향후 양준일의 활동이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그의 귀환은 여러모로 사유를 전개해볼 계기를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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