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앞두고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큰아들 현범이가 전단지를 들고 와서 “저는 이번 설날에 세뱃돈을 모아서 바로 이것을 살 거예요”라며 강력하게 의지를 표명했다.

아들이 가리킨 전단지의 ‘이것’은 전자제품 판매점에서 보급용으로 홍보하는 MP3였다. 휴대용 전화 사달라고 조르다가 엄격한 학교 방침에 의해 의지가 꺾인 후론 크게 부모에게 요구사항이 없던 아들인지라 그의 강력한 의사표현이 사뭇 흥미로웠다.

▲ 동요프로그램 '파란마음 하얀마음'을 진행하고 있는 김사은 PD와 아들 현범군
MP3를 갖고 싶은 이유를 묻자 “음악도 듣고, 라디오도 듣겠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그의 바람대로 설날 이튿날 MP3를 구입했다. 전자상품 전문매장에서 여러 가지 성능을 시험해가며 열심히 상품을 고르는 아들과 남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남편은 아들에게 MP3를 골라준 소감이 남다르다고 말했다. 남편도 중학생 시절 라디오에의 염원이 강렬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야구 중계를 듣기 위해서였단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의 신화를 낳은 전국고교야구대회는 당시 전 국민의 관심사였다. 고교야구대회 중계방송을 듣기 위해 ‘라디오하나 있었으면’하는 열망을 가진 청소년이 어디 남편뿐이었을까.

수많은 까까머리 중고생들이 선생님 몰래 야간자율학습시간에 라디오를 끼고 중 방송을 들었을 터이고 4강 진출이나 결승전과 같은 중요한 순간에는 선생님의 수업보다 야구 중계에 귀가 솔깃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부터 라디오와 함께 살았다. 흑백TV도 귀하던 70년대 초반, 라디오는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제 몸집보다 3배는 커다란 밧데리를 검은 고무줄로 칭칭 동여맨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할아버지의 자전거와 더불어 거의 우리 집의 가보 취급을 받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소방서의 정오 사이렌소리가 들리면서(1970년대만 해도 읍내 소방서에서 정오에 사이렌을 통해 시각을 통보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시에 울려 퍼지는 정오뉴스. 대들보에 대롱대롱 매달린 정오뉴스를 들으며 따뜻한 햇살을 뒤집어쓰고 툇마루에 걸터앉아 김치국밥으로 점심을 때우고 나면 <El Bimbo>의 경쾌한 선율과 함께 <오후의 교차로>가 흘러나왔고 이런 저런 소식과 함께 해저물녘이 다가오면 5시5분부터 ‘꽃과 같이 고옵게~ 나비같이 춤추며~♬♫♪’ 이렇게 시작되는 어린이왈츠를 시그널로 어린이 방송이 시작되었다. 아, <마루치, 아라치>나 <손오공>과 같은 라디오 연속극은 얼마나 박진감 넘치고 흥미로웠는지. 그 시각 골목마다 울려 퍼지던 아이들의 노랫소리, 맑은 함성을 잊을 수가 없다.

▲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중인 김사은 PD
중학교에 들어와서 독수리가 그려진 쉐이코 카세트라디오를 구해서 <엘리제를 위하여> <소녀의 기도>같은 클래식 테입을 들은 것이 클래식에 접근한 기회였다. 고등학교 무렵 운좋게 삼촌의 <파나소닉> 전축을 접수한 이후 파가니니의 <무반주 카프리스>와 사촌오빠가 선물해준 킹 크림슨의 <Epitaph> 음반이 제일 처음 소장한 음반이다.

대학에 진학해서 좀더 다양한 채널을 통해 클래식과 팝송, 가요를 접할 수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좋은 노래를 들으면 메모를 해두었다가 용돈을 모아 시내 음반점에 가서 LP레코드를 한 장 두 장 모으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와 라디오의 인연을 더듬어 추억하다보니 새삼 아들이 이 시점에서 ‘음악도 듣고, 라디오도 듣기 위해’ MP3를 구입하겠다는 마음이 십분 이해가 된다. 라디오 클래식 채널을 알려줬더니 ‘가끔 듣고 있다’는 말로 미루어, 지금은 컴퓨터게임의 배경 음악위주로 음악을 듣고 있지만 점차 클래식에도 몰입하게 되리라 믿는다. 남편은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 라디오는 내가 가보지 못한 더 넓은 세상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TV,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의 범람 속에서 라디오가 ‘꼴까닥’ 고사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은데 다행스럽게도 예나 지금이나 ‘라디오’를 통해 더 넓은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매력은 여전한 듯하다. 드디어, 우리 아들이 라디오의 매력을 발견한 것 같아 내심 기쁘다. 아들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야. 소리는, 더 넓은 세상의 이야기란다.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라디오에서 발견해보렴.

1965년 볕 좋은 봄, 지리산 정기가 서린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원광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행정대학원에서 언론홍보를 공부했다. 전공을 살려 지방일간지 기자와 방송작가 등을 거쳤고 2000년 원음방송에 PD로 입사, 현재 편성제작팀장으로 일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맑고 밝고 훈훈한 방송을 만들 수 있을까?” 화두삼아 라디오 방송을 만들고 있다.

지역 사회와 지역 문화에 관심과 애정이 많아 지역 갈등 해소, 지역 문화 발전에 관련된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 제작해왔다. 수필가로 등단, 간간히 ‘뽕짝에서 삶을 성찰하는’ 글을 써왔고 대학에서 방송관련 강의를 시작한지 10여년이 넘어 드디어 지식이 바닥을 보이자 전북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용량을 넓히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최근 전북여류문학회장을 맡았다. 방송에서나 인간적인 면에서나 ‘촌스러움’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다. http://blog.daum.net/kse1114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