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기나긴 죽음의 시절,
꿈도 없이 누웠다가

이 새벽 안개 속에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

흙먼지 재를 쓰고
머리 풀고 땅을 치며

나 이미 큰 강 건너
떠났다고 대답하라.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나 이미 떠났다고 대답하라’는 운동가요. ‘엄혹한 정세’를 매일 되뇌며 살았던 1980년대. 대학에 들어가서 들었던, 배웠던, 불렀던, 그것도 비장하게 외쳤던 그 노래의 노랫말을 쓴 시인 양성우.

▲ 경향신문 2월 14일자 7면
경향신문 홈페이지에서 2월13일에 올려진 “김지하가 하면 민주화고 내가 하면 정치냐”는 기사에서 양성우를 이렇게 소개한다.

‘겨울공화국’을 쓴 양성우 시인(65)이 이명박 캠프의 핵심인물이라는 소문이 문단에서 조심스레 돌았다. 양성우가 누구인가. 1975년 민청학련 관련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에서 시 ‘겨울공화국’을 발표해 광주 중앙여고 교사 자리에서 파면되고, 시 ‘노예수첩’이 일본 ‘세카이지’에 실리면서 국제간첩단 사건으로 몰려 2년반 옥살이를 했다....고은·이문구·조태일·박태순 등과 더불어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든 평민당에서 12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지금도 작가회의 자문위원이다.

“수많은 후배들이 찾아와 항의와 협박의 언사를 했습니다. 이명박 지지를 그만두라고. 왜 양성우가 거기 가있느냐고. 김지하, 황석영이 손학규 지지하는 것이나 백낙청이 여권후보 단일화 운동을 벌인 것은 정치가 아닌 지식인의 책무이고, 내가 하는 것은 정치냐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들과 맞설 입장은 아니지요. 대선이 끝난 뒤 서로 쌓인 감정을 많이 풀었습니다.”

최근 시인 양성우와 MBC 기자 김은혜를 두고 구구한 평론들이 가득하다. 이런 평론에 평론하나를 더하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고민하다 ‘에라! 그 많은 돌중에 나도 하나 얹어보자’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변절. 우리의 삶 속에서 가장 치명적인 낙인찍기가 바로 변절이라는 단어요 그 의미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단어요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켜야 하는 단어가 변절이다. 비록 변절한 자라도 대 놓고 ‘당신은 변절자!’라고 하는 그 순간 눈빛과 주먹이 동시에 흔들리는 단어다.

그런데 요즘 느닷없이 ‘변절’이라는 단어가 풍성하다. 그런데 요즘 너나내나 ‘변절’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특정인에게 손가락질한다. 변절이라며 낙인찍기를 하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러는 당신은 변절하지 않을 만큼 살고 있소?

어떻게 된 게 이 동네는 하루 자고 일어나면 특정인을 향해서 ‘변절’운운하는 자들이 속출한다. 그렇다고 특정인을 향해서 ‘변절’ 운운하는 자 치고 제대로 일하고 헌신하는 자 또한 흔하지 않은 것은 주지의 사실.

서설이 길었다. 변절로 매도하기 전에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인정하고, 왜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섰을까를 한 번쯤 이해하려는 노력이 절대적으로 아쉬운 상황이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이명박 정부에 서려는 사람들은 ‘변절’이고 노무현 정부에 섰던 사람들은 ‘운동’인가?

요즘 같은 하수상한 시절을 만나면서 ‘권력의지’라는 개념이 그렇게 와 닿을 수가 없다. ‘권력의지’라는 부정적인 어감을 돌파하며 노무현 정부든 이명박 정부든 그 어떤 정치권력에도 접근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없는 것이 개인적으로 부끄럽지, 권력의지를 갖고 뭔가 한 번 해보려는, 그 비난을 무릅쓰고 돌파하고자 하는 용기가 없는 것이 부끄럽지, 그 용기백배한 이들을 비난하는 것이 부끄럽지...이런 상념에 잠긴다.

그런 경험이 있다. 어느 선배가 지난 대선 때 전화를 걸어왔다. BBK 수사결과가 나오기 전의 일이다. 이회창이 당선될 수도 있다던 시기다. 그 선배 왈, “이회창 캠프에서 연락이 왔는데 미디어관련 정책을 맡아달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 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양문석 왈, “형! 형이 들어가서 ‘대선미디어연대’에서 발간한 정책자료집을 이회창 캠프의 공약으로 정리해 주세요.” 그 선배는 들어갔고, 이회창 캠프의 미디어관련 선거공약은 시민사회단체들이 만든 ‘대선미디어연대’ 정책자료집과 거의 유사한 내용으로 채워져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 때 주변의 믿을만한 지인께, “나는 죽어도 못하겠는데, 그 선배께 들어가서 우리 정책을 관철시켜 달라고 말할 때 진짜 죄송하더이다. 고심 끝에 제 말을 들어준 그 선배가 너무 고맙더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선배는 권력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미디어정책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면 된다. 권력의지를 일방적으로 몰아 붙여서 비난할 일이 아니다.

▲ 청와대 부대변인에 발탁된 MBC 김은혜 기자ⓒMBC
시인 양성우. 기자 김은혜. 그들을 향해 나중에 비난해도 된다. ‘당신이 들어갈 때 알아봤다’며 나중에 비아냥거려도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들어가서 독재정권에서 겪은 이 땅의 민중들의 경험을 그 속에 있는 자들에게 설명하고, ‘조중동’의 저질스런 보도를 맹비난할 수 있는, 스스로 ‘변절자’로 낙인찍히지 않도록 그 속에서 뭔가 새로운 흐름을 만들 수 있도록 ‘부담’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이명박 정부가 망하는 것을 바라는 것인가? 많은 이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망하는 것은 이 땅의 없는 자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하게 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성공함으로써, 그들의 젖은 눈과 갈라진 손과 힘겨운 다리에 힘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 보이고 있는 그 황당한 ‘신자유주의, 반 공공성’을 전적으로 허용함으로써 그 인기를 땅에 떨어뜨리고 다음 대선에서 한나라당 출신이 아닌 자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이 땅의 없는 자들의 삶은 무조건 자동적으로 나아 질 것인가? 아무도 모른다.

오늘의 삶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견제하고 감시하고 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공공성 사수’가 아니라 ‘사회 공공성 확대’를 주장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안으로 들어가서 할 수 있는 사람은 들어가야 하고, 밖에서 할 수 있는 자는 밖에서 ‘사회공공성 깃발’을 펄럭이게 해야 한다.

지금 일각에서 주장하는 ‘변절자’들이 평생 살아온 그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 택도없는 정책을 낼 때 그들을 향해서 준엄하게 ‘변절자’라는 낙인을 찍어도 늦지 않다. 지금 그들에게 해 줘야 하는 것은 ‘당신의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결코 들어가서 그들에게 포섭되지 말고 당신이 살아왔던, 그 삶의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가치를 지키고 전파하며 설득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이 결코 변절자라는 낙인을 이마에 찍고 평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고 한편으로 위로하고 한편으로 부담 주는 말을 해 줄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간곡히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모기다리만큼의 진보’라도 배설하는 감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냉정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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