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혜인 기자] 지난달 29일 여성단체는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판사 오덕식은 옷 벗어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지난 8월 법원은 가수 구하라 씨를 폭행하고 성관계 영상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던 전 남자친구 최종범 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 사이 구하라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박수진 변호사는 2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법원이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부적절한 판단이었다”며 “법원의 성인지 감수성 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녹색당,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등 7개 단체가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등 혐의를 받은 최종범 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오덕식 판사의 사직을 촉구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9일 서울중앙지법 앞에서는 여성단체들이 모여 구 씨 관련 재판을 담당한 오덕식 부장판사의 사직을 촉구했다. 이들은 법원이 사실상 불법 촬영 범죄에 면죄부를 준 셈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오 부장판사의 과거 판결을 언급하며 사법부의 성인식 수준을 지적했다.

지난 8월 재판부는 최 씨의 재물손괴, 상해, 협박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성관계 동영상 촬영은 무죄라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근거는 촬영 당시 소리가 났는데도 구 씨가 제지하지 않아 불법촬영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박 변호사는 “성폭법상 불법촬영죄 성립에 있어서 대부분 ‘의사에 반해서’라는 구속요건을 판단할 때 ‘적극적인 제지가 없었다’고 하면 ‘의사에 반하지 않았다’고 소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어 이 같은 판결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최 씨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또 한가지의 근거로 ‘연인 사이’였다는 점을 들고 있는데 박 변호사는 이또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성관계 횟수 등을 언급하거나 그전에 동거나 성관계를 하던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무죄와 관련 있는 사정으로 삼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일종에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을 기준으로 해서 이 정도 연인관계였다고 하면 일정 수준의 신체적 접촉을 용인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촬영도 (상대의) 의사에 반해서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 것"이라며 "‘전형적인 피해자다움’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특히 대법원의 앞선 판결보다 후퇴한 판결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7월 대법원이 선고한 판결에 따르면 일정 수준의 신체접촉을 허용하더라도 그 동의는 언제든지 번복될 수 있고, 본인이 예상한 범위를 벗어난 신체적 접촉에 대해서는 거부할 자유가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

이밖에 1심 판결 과정에서 부장판사가 비공개인 동영상을 확인했다는 점, 판결문에 성관계 장소와 횟수 등이 구체적으로 기재돼 있다는 점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박 변호사는 “피해자 구 씨로서는 충분히 2차 피해로 느낄 수 있고, 검찰도 이를 고려해 기소할 당시 해당 동영상을 증거로 제출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판결문에 구체적으로 성관계 횟수 등이 기록된 데 대해 박 변호사는 “성폭법이나 성범죄 사건 재판에 관한 대법원 규칙에 따르면 법원은 재판과정에서 피해자의 특정 인권을 배려해야 하고 사적인 비밀이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며 “재판부가 선고 당시 주문이나 요지 정도만 언급하면 되는데 굳이 구체적 사적인 사실관계까지 일반인에게 공개된 상태에서 낭독한 것은 굉장히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했지 않나 생각이 든다”고 강조했다.

박 변호사는 “게다가 언론이 보도하고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구체적 사실관계가 알려지면 충분히 2차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더 부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지난 29일 법원 앞에서 여성 단체들이 외친 “판사 오덕식은 옷 벗어라”는 구호에 대해 박 변호사는 “구 씨 사건뿐 아니라 다른 사건에서도 성인지 감수성이 느껴질 수 있는 판결내용들이 있었다”며 “고 장자연 씨 성추행 혐의로 기소된 한 언론사 기자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권력적 위계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심리를 했고, 결혼식장에서 3년 동안 40회 이상 몰래 카메라를 촬영한 사진기자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밝혔다.

재판부의 성인지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교육과 제도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지만, 고정 관념을 바꾸기엔 쉽지 않다”며 법적 규제가 동반돼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강간 피해자 보호법‘을 통해 피해자의 이력이나 사건과 무관한 내용을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수집하거나 신문할 수 없도록 제어하고 있다. 박 변호사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규제를 통해 재판과정이나 수사과정에서 피해자를 조금 더 보호하는 제도가 마련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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