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조사가 끝나봐야 알겠지만, 보도대로 국보 1호인 남대문에다 불을 지른 것이 사실로 드러나면 용의자는 엄중한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천재지변도 아니고 불을 질러 600년이나 되는 목조 건축물이자 국보 1호를 순식간에 전소시켜 많은 국민들이 ‘문화 국치일’이라 부를 정도로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른 문화재도 아닌 국보 1호인 숭례문이 방화의 대상이 되고 전소되는 참사가 일어난 것에 대해 색다른 의견을 내놓은 사람이 있다.

▲ 한국일보 2월13일자 1면.

마산시에 본사를 둔, 경남 도민 6천여명이 조금씩 출자해 만든 경남도민일보 허정도 대표이사 사장.

건축가인 경남도민일보 사장의 눈에 비친 남대문 화재 진화 장면

허 사장은 설 연휴 마지막 날인 10일 밤 남대문이 전소되는 모습을 TV를 통해 안타깝게 바라보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한다. 신문사 사장이라서 그랬거니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오랫동안 마산에서 YMCA 운동 등 시민운동을 하다 마산 YMCA 이사장을 맡았다. 2006년 6월에는 한국YMCA 전국연맹 이사장에 선임된 시민운동 지도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 사장이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화재 현장을 눈이 빠져라 안타깝게 지켜 본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건축학을 전공하고 건축학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는 전문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남대문 화재 현장을 누구보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샜는지 모른다.

기자가 11일 아침 경남도민일보에 볼 일이 있어 마산에 내려가 허 사장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 화제가 남대문 참사로 이어졌다.

허 사장은 대뜸 화재 진압을 위해 애쓴 소방관들의 노고를 모르지 않는다면서도, 600년 동안이나 모진 비바람을 견딘 우수한 목조건축물 기와지붕에다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려댄다고 불길이 잡힐 것으로 생각했다면, 이는 우리 건축물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기와(지붕)를 통해 내부로 들어가는 구조나 건축물이라면 어떻게 600년을 버텼겠느냐?”는 것이다.

그것과 별개로, 또 방화 행위와 방화 용의자에 대한 비난과 비판과 별개로 허 사장은 “다른 문화재도 아닌 숭례문이 참사의 대상이 된 것 자체가 우리 사회 전체에 예(禮)가 땅에 떨어진 모습을 상징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 중앙일보 2월13일자 4면.

우리 사회를 받치고 있는 축의 하나인 유교의 중심 사상 중의 하나가 예(禮)인데, 이는 단순히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의를 지키는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돈 지상주의, 물신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경종(?)

기자가 유학자나 유학도는 아니지만, 듣고 보니 이해할 만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근대화와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돈 지상주의, 물신(物神)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으로 불리며, 개인과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 경영에 있어서도 인의예지신을 지키려고 노력해 온 나라다.

대부분의 우리 부모님과 조상들은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인간과 가장, 후손으로서 도리를 다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는 염치를 가진 민족이고 사회였다.

그러다가 한 순간에 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다시 남대문을 비롯한 4대문으로 돌아가자. 여기에 종로 2가에 있는 보신각(普信각)도 보태진다. 이성계의 조선은 공식적으로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편 것으로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를 무력으로 무너뜨린 이른바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건국한 뒤 개성은 기(氣)가 쇠했다는 명분을 들어 도읍을 한양(서울)으로 옮기게 된다. 기가 실제 쇠했느냐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새 왕조를 새웠으니 새로운 땅에다 도읍을 정하고 싶지 않았을까?

새 도읍의 다른 후보지 중에는 계룡산 인근의 신도안(新都內)과 파주 적성 등도 들어있었다고 한다. 실제 신도안은 글자 그대로 새 도읍지 터공사를 하다 중단한 흔적으로 주춧돌까지 남아있다.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신권정치를 꿈꿨던 정도전과 무학대사였다고 한다.

두 사람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것까지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나 궁궐 터를 어디로 할 것인가를 놓고 팽팽히 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도전은 지금의 청와대와 경복궁 터를 주장했고, 무학대사는 그럴 경우 풍수이론에 따라 좌청룡(左靑龍)을 뜻하는 동쪽의 낙산(洛山)이 우백호(右白虎)인 서쪽의 인왕산(仁王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고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장자(長子) 상속이 어려워 질 것을 우려하여 인왕산 아래다 궁궐을 지을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우수한 조선 민족의 기를 꺾기 위해 산 허리를 짜르는 것도 모자라 전국의 주요 산 꼭데기에 쇠말뚝을 박고 산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지금도 인왕산(仁王山)에 올라가면 일본놈들이 바꿔놓은 한자이름 인旺산으로 그대로 표기된 팻말이 남아있다.)

그럴 경우, 좌청룡은 지금의 청와대 뒷산이 되고 우백호는 남산이 되어 좌청룡이 우백호보다 우람하고 당당하다는 것이다. 풍수이론에서는 아들의 경우 좌청룡은 장남, 우백호는 차남이 되고 남녀를 따지면 좌청룡은 남자 우백호는 여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약간 각색해서 풀어내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 역할을 한 무학대사의 주장에 대해 정도전은 중국과 한국의 역대 궁궐 터 중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앉은 궁궐은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판정승을 거두게 된 것으로 보인다.

‘동대문쪽 낙산이 낮아 흥인문에 갈 지(之)자 붙여 보강’

▲ 한겨레 2월13일자 5면.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좌청룡인 낙산이 낮은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역시 풍수이론에 따라 터가 약점이 있으면 처방도 있는 법.

경복궁을 둘러싼 4대문을 세울 때 낙산 쪽에다 지금 우리가 동대문이라 부르는 흥인문(興仁門)을 세우며 낮은 낙산(洛山)을 보강한다는 뜻에서 ‘갈 지(之)’자를 넣는다. 풍수에서 갈 지(之)자는 산을 뜻한다. 그래서 동대문의 공식 이름이 흥인지문(興仁之門)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집을 짓든 도시를 설계하든 나름의 이론과 시스템에 따랐던 것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따라 서대문은 의(義)를 돈독히 한다는 뜻의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예(禮)를 숭상한다는 숭례문(崇禮門), 도성 북쪽에는 지혜를 넓힌다는 홍지문(洪智門)이 있다. 그리고 4대문의 안쪽 가운데 지점인 종로 2가에 보신각(普信閣)을 세운 것이다. 홍지문(弘智門)은 그 당시 정치인들이 백성들이 똑똑해져서 정치를 바르게 하는지 잘못하는지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북대문을 홍지문이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해서, 그 당시 뜻으로 개혁(改革)과 정화(淨化)라는 의미를 지닌 숙청(肅淸)이라는 말을 붙여 '개혁의 문'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숙정문(肅靖門)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를 숭상하고 고취한다는 뜻을 가진 숭례문이 천재지변도 아니요 ‘돈에 눈이 먼 한 노인’에 의해 방화로 소실됐으니, 시민운동을 해오며 지역신문 사장을 맡고 있는 건축가의 눈에는 예가 땅에 떨어진 우리 사회 전반의 모습과 숭례문 전소가 오버랩된 것이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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