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영삼] 조금의 관심과 배려가 있었다면 구하라는 극단적 선택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전조증상이 보였음에도 우리 사회는 방관, 아니 오히려 나락으로 몰아붙였다는 점에서 그녀를 떠나보낸 마음은 황망하기만 하다.

구하라는 우울증이 생겼음을 이미 고백한 바 있다. 또 악플에 대한 괴로움을 피력했음에도 악플러들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언론 또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니터링해 가며 기사를 써냈고, 악플러는 하지 않아도 될 비난을 쏟아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한차례 극단적 선택을 시도해 미수에 그쳤음에도 방관하며 그녀가 괜찮을 거라 지나쳤다. 사실 가장 위험한 시기에 케어해주지 못했다는 점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고 안타까운 대목이기도 하다.

가수 겸 방송인 구하라 [연합뉴스 자료사진]

구하라가 일본에서 활동을 할 때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고, 안검하수로 쌍꺼풀 수술한 것을 두고도 비난을 퍼붓는 이들도 있었다.

활동하며 올리는 SNS 사진은 그 자신의 위로거리였지만, 그걸 퍼나르며 듣지 않아도 될 악플을 받게 한 건 언론의 책임. 동시에 그런 언론의 특성을 알면서도 악플을 달던 이들도 책임을 피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설리를 떠나 보냈을 때에도 사실 가장 위험한 시기를 겪고 있던 건 구하라였다. 악플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좋지 않아 그녀를 격려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악성 댓글을 다는 악플러들의 극악스러움은 그 시기에도 이어졌다.

구하라가 SNS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음에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댓글을 단 이들도 있었고 그 댓글에 공감을 누른 이들도 있었으니 그녀가 그를 목격했다면 슬픔은 배가되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다. 주변인이 신경 썼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냉랭한 분위기가 상당 부분 보였다는 점은 다시 생각해도 야만스럽기만 한 장면으로 남는다.

고인이 된 가수 구하라(왼쪽)와 설리 [연합뉴스 자료사진]

괜찮은 척, 왕성한 활동을 하는 것처럼 SNS 상에 기록물을 올리고 멘트를 하는 것을 고깝게 생각했던 이들, 그리고 그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듯 기사를 쓰고 기어코 비난의 화살받이로 만든 언론은 이번 사태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연예인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말. 그건 혼자 충분히 설 수 있는 이들에게나 쓸 수 있는 말이고, 다른 쪽으로는 책임감 없는 이들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힘들게 도움을 청하고자 올린 SNS 메시지에 반응해 고작 단 댓글이 그런 댓글들이었다니.

그녀를, 그리고 그녀와 같은 상황에 있는 이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사회. 구성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시스템 문제도 돌아볼 때이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영삼. <미디어 속 대중문화 파헤치기>
[블로그 바람나그네의 미디어토크] http://fmpen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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