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어머님은 영화를 좋아하셨다. 지방 도심에 딱 하나 있었던 극장에 가기 위해 버스를 한참이나 타야 했다.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가던 극장,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영화도 아마 그렇게 보게 된 영화였을 것이다. 왜 아니 그랬겠는가. 1967년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팔도강산>은 당시로서는 32만 6000명이 관람한 히트작이었으니, 돌고 돌아 우리가 살던 그 지방 소도시 유일한 영화관에서도 개봉의 혜택을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하게 그때 본 영화가 <팔도강산>의 몇 번째 편이었는지 어린 나는 몰랐다. 김희갑, 황정순 배우가 나오고, 당대에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나왔다는 아스라한 기억뿐. 1967년부터 팔도강산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6편의 영화, 번외로 <팔도 며느리> 중 어느 한 편이었을 것이다.

<팔도강산>으로 알려진 이 영화는 '근대화의 성취'를 빛나게 드러낸 시리즈 영화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일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두 노부부가 각지에 사는 자식들을 만나러 떠난다는 설정은 같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서울에 살던 기업체 사장이면서도 부모를 나몰라라 하는 큰아들네와, 여관을 운영할 정도로 잘살지만 아내에게 꼭 잡혀 사느라 제대로 부모 대접도 못하는 둘째아들로 인해, 지방에 사는 다른 자식들을 찾아나서는 슬픈 이유에서이다. 그 당시 축적된 부의 부조리를 비판적으로 다룬 '현실 고발적'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지방에 사는 아들네, 학교 선생님이라지만 형편이 어려워 당시에 금지된 미제 물건을 팔다 경찰서에 잡혀가고 만다. 결국 거기서도 얼마 있지 못한 부부를 가장 따뜻하게 맞아주는 건 가장 가난한, 광부로 일하는 아들이다. 이렇게 영화는 60년대 산업화 이후 한국 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한 '빈부격차'와 '배금주의'의 속물성을 예리하게 꼬집는다.

최초의 국책 영화

영화 <팔도강산> 포스터

하지만 이렇게 당대 사회적 갈등이 되고 있는 계층의 문제를 다루었던 <팔도강산>은 공보부 산하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했다.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1800만원이 투입되었으며 김희갑, 황정순 배우는 물론 김승호, 최은희, 김진규, 이민자, 박노식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총출연했다. 노부부가 자식들이 사는 경제개발의 성과가 드러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몰라보게 발전한 조국에 감탄하는 한편, 자식들이 조국의 근대화에 솔선수범하고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는 내용으로, 최초의 '정부 홍보영화'이다.

"팔도강산 좋을씨구 딸 찾아 백리 길/ 팔도강산 얼싸안고 아들 찾아 천리 길/ 에헤야 데헤에야 우리 강산 얼씨구/ 에헤야 데헤에야 우리 살림 절씨구/ 잘 살고 못 사는 게 팔자만은 아니더라/ 잘 살고 못 사는 게 마음먹기 달렸더라.”

전국 각지의 유명 명승지에서 당대 최고의 가수였던 최희준이 직접 <팔도강산>의 주제가를 부르는 것을 비롯하여, 현인, 최숙자, 은방울 자매 등이 <신라의 달밤>, <삼다도 소식>, <목포의 눈물> 등의 히트곡을 불러 영화적 재미에 '흥'을 더해준 이 영화는 1967년 국도극장에서 개봉, <미워도 다시 한번> <성춘향>에 이어 60년대 세 번째로 관객을 많이 동원한 영화가 되었다.

그런데 1967년에 <팔도강산>이 만들어진 계기엔 '선거'가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선거를 앞두고 경제발전 성과의 홍보수단으로 <팔도강산>을 무료로 보여주는 등 영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렇게 국책 영화의 효시가 된 <팔도강산>. 이에 당시 야당인 신민당은 '정부 업적을 소개하는 영화를 무료로 상영하는 건 선거법 위반이라며 상영 중지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결국 선거관리위원회 위원들 9명이 직접 보고 '선거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무사히 상영하게 된 영화. 많은 관객 동원으로, 그리고 그를 통한 국책 홍보의 성공적 사례로, 해외에 있는 사위들을 찾아가는 <속 팔도강산>을 비롯하여, <내일의 팔도강산(1971)>, <우리의 팔도강산(1972)>, <아름다운 팔도강산(1972) 등이 계속 만들어졌고, <팔도 사나이>, <팔도 식모>, <팔도 며느리> 등 '팔도' 시리즈의 효시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74년에는 KBS 연속극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만들어져 75년까지 398회 방영, 시청률 40%의 새로운 기록을 갱신하며 스테디셀러의 왕관을 유지했다.

가족의 원형, 가족의 이상형

영화 <팔도강산> 스틸이미지

1971년 작 <내일의 팔도강산>에서 TV 좌담회에 참석한 김희갑 배우는 조국의 근대화를 예찬하는 일장 연설을 하는 등, 국책 영화로서 <팔도강산> 시리즈 곳곳에는 경제발전에 대한 노골적 찬사가 빈번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계속 제작되고, 드라마로 만들어질 만큼 대중의 사랑을 받은 데에는 그저 발전된 나라에 대한 성공적 ‘홍보’에만 그 이유가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낯 뜨거운 홍보에도 불구하고, 당대 내로라하는 배우들의 호연과 함께 1남6녀의 대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이 담겨있고, 전국에 서로 떨어져 있어도 결국 '한 가족'이라는, 우리 사회를 지탱했던 가족주의에 대한 충실한 해석이 오랫동안 이 작품을 사랑받도록 한 결정적 이유가 아닐까.

코믹 배우 출신답게 아버지라지만 늘 말이 좀 앞서는, 하지만 결정적일 때 집안의 기둥으로서 아버지상을 강직하게 보여주시는 김희갑 배우. 그런 아버지의 그늘에서 조용히 계신 듯하지만, 시련의 상황에서 그 누구보다 의연하게 그리고 따스하게 자식들을 다독이며 어루만지는 어머니 황정순 배우. 두 분의 모습은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 1960년대 이래 우리네 '부모'님의 전형으로 오래도록 아로새겨졌다.

그리고 영화 설정 상 근대화의 역군으로 등장하는, 전국 자식들이 살아가는 모습엔 서로 사랑하고 헤어지고 심지어 사별하고, 그리고 장인 장모님의 주선으로 사위가 또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등 부대끼며 살아가는 인간사의 면면이 정겹게 잘 드러난다. 또한 6,70년대 우리 사회를 지탱했던, 노력하면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근대적 인간형'의 전형을 드라마 속 인물들이 각자 직업은 다르지만 충실히 수행해내며 당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망'적 메시지를 주었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인기 요인이다.

그리고 아직은 넉넉하지 않고 사업적 실패를 겪어도, 결국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다시 힘을 얻고 살아가는, 서로가 떨어져 있어도 유감없이 발휘되는 '가족'의 힘이야말로 이 영화를 오래도록 스테디셀러로 만든 요인이 아니었을까.

영화 <팔도강산> 스틸이미지

영화의 엔딩, 이제는 쑥스러워서 하지도 않는 회갑연 (영화 속 노부부로 등장하는 김희갑, 황정순 부부가 겨우 '환갑'이다). 전국의 자식들이 부모님을 뵈러 고향인 서울로 이른바 역귀성을 한다. 물론 영화 속 엔딩은 환갑이지만, 이렇게 전국 자식들이 부모님을 뵈러 찾아오는 그 '귀향'의 의식이, 여전히 추석하면 부모님을 찾아 고향으로 떠나는 우리네 명절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추석의 의미가 예전 같지 않다지만 여전히 '가족'의 대표적 명절인 추석에 그 예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서 봤던, '가족' 영화의 대표작인 <팔도강산>을 끄집어내 보는 건 그 이유에서이다.

그런데 만약 2019년에 이 영화가 리메이크된다면 어떨까? 환갑이라도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에 난색을 표하는 시대, 게다가 이 시대 환갑을 맞이한 부모 세대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 세대였으니 1남 6녀 자식들이 있다는 설정 자체가 우리 시대엔 난센스다 싶다. 그래도 전국 방방곡곡에 1남 6녀가 있다치고 만들어진다면, 2019년 발 <팔도강산>은 원작이 보여줬던 빈부격차의 페이소스가 듬뿍 담긴 '가족애사'에 가깝지 않을까. 부모님이 다짜고짜 찾아든다는 설정 자체가 이제는 부모자식 사이에도 실례가 되는 세상, 불과 몇십년이 되지 않은 사이 우리 사회가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얼마나 큰 변화를 겪어왔는가를 <팔도강산>은 보여준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 다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사족으로, 그런데 왜 '팔도강산'이었을까? 원래 남북을 합쳐 팔도강산이라 관례적으로 말하던 우리의 언어습관에 굳이 딴지를 거는 대신, 북도와 남도로 나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를 각각으로 치는 '꿈보다 해몽'식의 해석으로 <팔도강산>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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