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송창한 기자] 우리사회 혐오표현의 조장자로 정치인과 언론이 지목됐다. 국가인권위원회 국민인식조사결과 국민 절반, 또는 그 이상이 혐오표현을 조장하는 주체로 국회의원 등 정치인과 언론을 지목했다. 이른바 '따옴표 저널리즘' 폐해로 정치인의 혐오표현이 언론을 통해 여과없이 확산되는 현상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혐오표현 관련 미디어 가이드라인 제정 필요성이 제기된다.

국가인권위는 27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혐오표현 진단과 대안마련 토론회'를 개최, 혐오표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혐오표현을 조장하는 주체로는 정치인과 언론이 지목됐다. 정치인이 혐오표현을 조장한다는 응답은 58.8%, 언론이 조장한다는 응답은 49.1%로 나타났다.

정치인, 언론이 혐오표현 관련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응답은 각각 3.8%, 11.3%에 그쳤다. 정치인과 언론이 조장하는 주요 혐오의 유형은 출신지역 혐오, 여성 혐오, 이주민 혐오, 성소수자 혐오 등으로 일치했다.

조사 응답자들은 향후 혐오표현이 범죄로 이어지거나, 사회갈등을 심화시킬 것으로 내다봤다. 혐오표현이 범죄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응답이 81.8%로 가장 높았고, '사회갈등이 더 심해질 것' 78.4%, '차별현상이 고착화될 것' 71.4%, '사회적 소수자의 표현의 자유가 더 위축될 것'(62.8%) 등의 전망이 뒤를 이었다. 반면 자연적으로 혐오차별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응답은 22.2%에 불과했다.

이에 응답자 대다수는 혐오표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든 정책들에 대해 동의했다. 정부차원의 종합대책, 국회 차원의 혐오표현 반대 표명, 교육의 확대와 캠페인 강화, 규제강화, 형사처벌, 차별금지법 제정, 자율규제, 언론의 혐오 조장보도 자제 등 대응정책 전반에 적게는 70%, 많게는 85% 이상까지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에서도 가장 많은 동의를 얻은 대책은 '언론의 혐오 조장 보도 자제'(87.2%)였다.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에 대한 국민인식조사 결과'

이 같은 조사결과에 강문민서 인권위 혐오차별대응기획단장은 "가장 높은 대응정책 태도가 언론의 혐오 조장 보도 자제다. 언론이 혐오표현을 촉발할 수 있지만 시정할 수도 있다는 것"이라며 "2018년에 혐오표현 예방 가이드라인 마련을 위해 기자 44명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63.6%가 혐오표현 관련 교육이 전혀 없었다고 응답했다. 언론인 인식제고가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언경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언론의 이른바 '따옴표 저널리즘'이 무분별한 혐오표현 확산에 기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 사무처장은 "조사결과를 보면 혐오표현과 미디어의 상관관계를 시민들도 이미 전부 알고있다"며 "언론이 혐오표현을 어떤 시각으로 다루는가, 그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 혐오표현을 '혐오표현'이라고 적시하며 전하는 것과 따옴표 표현으로 전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어 김 사무처장은 기존 언론 뿐 아니라 유튜브, 포털 등에서 혐오표현이 촉발·확산되고 있으며 기존 언론보도와 유기적인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만큼 '인권보도준칙'을 넘어서는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모든 미디어에 대한 확장 가이드라인이 도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김 사무처장은 '가이드라인'에 대한 실효성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포털 뉴스제휴평가위원회가 혐오표현에 대한 벌점을 강하게 부여해 언론사들이 자정노력을 해나갈 수 있도록 조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양재규 언론중재위원회 대전사무소장은 언론이 제3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라도 혐오표현을 여과없이 전달했다면 법적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양 소장은 "정치인 등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이 혐오표현을 하면 언론이 그대로 보도하는 이유는 언론의 객관주의 취재기법 때문인 것 같다"면서 "간접인용보도라도 언론사에서 혐오표현을 보도하면 법적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김동훈 한국기자협회 부회장(한겨레신문 기자)은 가이드라인 마련이 실효성을 나타낼 것이라는데 무게를 뒀다. 김 부회장은 "15년 전 자살보도준칙을 만들었는데 현재 자살보도를 보면 상당히 좋아진 점이 있다. 자살방식을 표현하지 않고, 자살자 신원을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안나온다"고 했다. 레거시 미디어 보도에 대한 게이트키핑, 내부감시 등의 체계에 가이드라인을 더해 혐오표현이 걸러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번 조사는 인권위가 지난 3월 20일부 22일까지 성인 1200명을 대상으로 모바일 설문조사 형태로 실시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8%p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7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혐오표현 진단과 대안마련 토론회'를 개최했다. (사진=미디어스)

한편, 이날 토론회에서는 기존 인터넷상 혐오표현 규제를 담당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혐오표현에 대한 심의 기준과 처리결과가 무분별해 실제 우리사회 혐오표현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게 왜곡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지적이다.

윤성옥 경기대 교수는 2018년도 방통심의위 통신심의 소위원회 회의록을 분석, 국내 혐오표현 심의현황을 살폈다. 방통심의위는 일반인 신고와 관계기관 심의신청,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심의대상을 선정해 통신심의 소위를 거쳐 전체회의를 통해 심의결정을 한다.

윤 교수 분석결과 2018년 혐오표현 심의는 총 2049 건이었다. 심의제재 현황은 전체 1959건 중 1948건(99.4%)이 삭제 조치, 접속차단이 6건(0.3%), 심의를 하고 제재를 받지 않은 사례 1건 등이었다. 한 해동안 2천 건 가까운 혐오표현 심의가 이뤄지는데, 안건으로 상정되기만 하면 대부분 삭제 조치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윤 교수는 "심의건수를 일일이 다 확인해 검토하기에 시간상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부분 사무처 의견대로 결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더 큰 문제는 심의대상 선정부터 방통심의위의 자의적 판단 개입 여지가 크다는 것이다. 회의록에 따르면 혐오표현에 대해 방통심의위 사무처가 18건을 상정하면 18건이 삭제되고, 180건을 상정하면 180건이 삭제되고 있다. 심의기준 역시 '비하가 심하다', '조롱한다' 등의 근거로 제재를 결정하는 등 일관된 기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윤 교수는 "특히 집중심의라는 명분하에 특정 사이트만을 대상으로 심의를 할 경우 여성혐오 건수가 높을수도, 반대로 남성혐오 건수가 높을 수도 있다"며 "따라서 방통심의위 심의결과만을 본다면 실제 어떤 분야의 혐오문제가 우리사회에서 심각한지 판단하기가 불가능하고 나아가 현실을 왜곡할 우려마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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