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는 한나라당 총선 기획단장 역할을 자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혀야 할 시점이 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명박 당선자가 추진하고 있는 정부조직개편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것을 두고 조선일보가 29일 사설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비판한 대목은 이해 가능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권력 이양에 따른 인간적 협조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조선일보가 의원 수까지 제시하며 노 대통령의 거부권 시사를 비판하는 건 비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판단이다. 29일자 조선일보 3면 첫 번째 기사를 살펴보면 ‘대통령 거부권 뒤집으려면 의원 200명 확보해야’라는 중간제목을 확인 할 수 있다.

▲ 조선일보 1월29일자 A4면

조선일보가 중간제목으로 강조한 것을 보면 의원 200명은 거부권 행사를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의원 수만을 의미한다고 보기 어렵다.

차기 이명박 정부가 출범 후 실시되는 4. 9총선에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선 20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조선일보가 대신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200명의 국회의원은 안정적 국정운영뿐만 아니라 헌법을 고칠 수 있는 상당한 힘을 갖는다. 균형과 견제의 기능을 국회에서 기대하기 어려운 의원 수이다.

최근 정가에선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많으면 220석 실패해도 180석은 확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가 제시한 200명의 국회의원은 한나라당의 총선 최소 목표수를 제시하는 가이드라인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조선일보에게 한나라당의 총선 기획단장 역할을 자임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대통합민주신당이 제 1당으로 있는 현재 구도를 살펴보면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저지하기 위한 ‘재적의원 298명의 3분의 2선인 200명’을 확보하기 어렵다. 조선일보의 지적대로 ‘한나라당 의석 130명에 추가로 70명의 도움을 얻어야 한다’는 얘기다.

통합신당이 당혹스러워하고 있다지만 국회 표 대결 과정에서 통합신당의 이탈 가능성은 아직 적어 보인다. 또한 거부권 행사 저지를 위해 추가적인 도움을 줘야 하는 의원 70명은 통합신당 의원수의 과반수를 넘어서는 수치다. 17일 현재 통합신당 의원 수는 137석이다.

▲ 서울신문 1월29일자 5면

한나라당이 거부권 행사 저지를 의원 빼내기라는 구태를 재현할 가능성도 낮다. 총선이 코앞에 다가왔으며 공천 문제로 한나라당 내부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따져보아도 현실적으로 한나라당이 거부권 행사 저지를 위한 의원 200명을 확보할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가능하지도 않는 의원 200명을 조선일보는 왜 강조하고 나선 것일까? 조선일보의 속내는 역시 4. 9총선에 가있다.

이날 조선일보 기사는 이 당선자의 한 핵심측근이 “국민들이 원하는 정부기구 축소를 방해하면서까지 총선을 망치려는 당이 있겠느냐”면서 조직개편이 불발될 경우, 정치적 책임을 신당 측에 묻겠다는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조직개편보다 총선을 우위에 두고 있음을 한나라당이나 조선일보가 시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나눌 수 없는 것이 권력이라고 했다. 그렇듯이 권력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잡음, 대립은 피할 수 없다. 29일자 경향신문은 이번 노 대통령의 거부권 시사를 두고 ‘사상초유’의 일이라고 평가했지만 과거 권력 교체기에 벌어졌던 신경전을 전했다. 정권 승계의 성격이 강했던 김대중 정권에서 노무현 정권으로의 권력이양, 또는 노태우 정권에서 김영삼 정권으로의 권력이양 과정에서 대립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권력이 교체될 당시, 발목잡기 논란이 발생한 바 있다.

▲ 경향신문 1월29일자 3면

경향신문 기사를 인용해본다.

'DJP 연합’을 통해 탄생한 김대중 당선인은 예상과 달리 김영삼 정부와 정면 대립하지 않았다. 외환위기가 최대 화두로 떠오르면서 김당선자가 여기에 ‘올인’ 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목소리를 낮춘 데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쪽에서 “인수위는 인수만 하라”는 말이 나오고, 김대중 당선자쪽에선 ‘북풍 사건’ 관련 문건 파기 가능성을 제기하는 등 파열음도 들렸다. 특히 김대중 정권은 정부 출범 후 여소야대 국면에서 한나라당의 총리 인준 거부로 곤욕을 치렀다. 김종필 총리 후보자는 6개월간 인준을 받지 못해 ‘총리 서리’ 꼬리를 달아야 했고, ‘발목잡기’ 논란으로 연결됐다.

노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바람직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일보가 김영삼 정권에서 김대중 정권으로 권력이 교체될 당시, 현재와 같은 비판의 날을 세웠는지 관심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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