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보장은 허구적 당위가 아니라 민주사회의 존립을 위한 현실적 진리이자 생생한 역사적 교훈이다. 그러나 지난 21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한나라당 안상수 의원의 대표발의로 국회에 제출한 ‘방송통신위원회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방통위 설치법안)’은 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훼손할 우려가 높은 독소조항들을 담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대통령이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닌 방송·통신 정책 수립과 규제 권한을 실질적으로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송통신위원의 구성을 정하고 있는 법안 제5조 제2항이 바로 그러하다. 이에 따르면 5인의 방송통신위원 중 대통령이 2인을 지명하고 나머지 3인을 국회 추천을 통해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국회 추천이 여야의 의석수를 기준으로 이루어지게 되므로 사실상 대통령 지명을 포함하여 여당이 4인의 방송통신위원을 차지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사회의 다양한 여론을 민주적으로 수렴하기는커녕, 1명의 야당 추천 위원을 들러리 삼아서 대통령과 여당의 입맛대로 사회적 공기인 방송과 통신을 휘두르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선거를 통해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은 대통령과 여당이 방송·통신 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있어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대통령과 여당이 야당이나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등의 독선을 저지르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 또한 대단히 중요하다.

이 때문에 5인으로 구성되는 미국의 연방통신위원회(FCC)는 특정 정당의 소속 위원을 3인 이하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방통위 설치법안을 만들면서 FCC를 모델 삼았다고 밝혔지만, 어찌된 사연인지 막상 가장 중요한 위원 구성의 문제에 있어서는 엉뚱한 조항으로 방송의 독립성을 난도질하고 말았다.

게다가 법안 제13조에 따르면 위원장은 단독으로 의안을 제기할 수 있고 위원은 2인 이상의 찬성으로 의안을 제기할 수 있다. 이렇다면 대통령과 여당이 4인의 방송통신위원을 독식하는 구조에서 정상적인 의안 제기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여당이 아닌 1인의 위원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처럼 정부 여당과 다른 의견을 회의에서 제시할 수조차 없는 위원회라면, 차라리 ‘합의제 위원회’라는 간판을 일찌감치 떼어버리고 ‘방송통신장악부’라고 개칭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다.

방송통신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성을 위협하는 또 다른 조항은 법안 제8조 제2항이다. 이에 따르면 위원은 직무 수행에 있어서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지시를 받지 않도록 정하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부당한가를 규정하는 절대적인 기준을 세우기 어렵기 때문에, 자칫 외부의 간섭과 지시를 정당한 것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는 셈이다.

이는 외부의 ‘어떠한’ 지시나 간섭도 받지 아니한다고 밝히고 있는 현행 방송법 제26조에 비해 분명한 퇴보다. ‘어떠한’이란 말이 포괄적이긴 하지만 ‘부당한’이란 말보다는 명확하게 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와 관련하여 우려스러운 점을 법안 제13조 제3항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는 위원회의 회의를 공개하되 ‘상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에는’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상당한 이유’라는 표현은 대단히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국가안보에 직접적인 위기를 초래하는 경우 등으로 구체적으로 법률과 시행령을 통해 적시하지 않은 모든 위원회의 회의는 공개하는 것이 마땅하다. 방송통신사업자의 민감한 이해관계 등을 핑계로 밀실에서 정치적, 경제적 흥정을 일삼지 않기 위해서는 위원들의 발언 하나하나를 시민들이 직접 감시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제12조 제2항도 지난 수 년 동안 무수히 학계와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산업계에서도 지적해 온 문제점을 여전히 답습하는 내용으로 조속한 수정이 필요하다. 법안은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정책을 심의·의결하는 경우에 방송영상정책과 관련된 사항을 문화부장관과 합의하도록 정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가장 핵심적인 직무가 무엇인가? 법안 제12조 제1항이 밝히고 있듯이 방송과 통신의 주요 정책을 계획하고 의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핵심 직무를 독임제 부처의 장관과 ‘협의’도 아니고 ‘합의’해야 한다는 것은 결국 방송·통신 정책의 독립성을 또 다시 훼손하는 일이다.

더욱이 방송통신위원회의 설치 목적을 법안 스스로도 방송과 통신의 융합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분산되어 있는 관련 기능을 일원화하여 부처 간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효율적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낡은 틀을 잔존시키는 것은 새 정부 인수위가 그렇게나 강조하는 ‘효율성’과 ‘산업발전’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단체는 현재의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 등의 심의기능을 포괄하여 새로이 설치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위원 구성에 있어서도 법안이 밝히고 있는 ‘방송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독소조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방송과 정보통신 내용의 심의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독립성과 공정성이 요구되는 영역이다. 그런데 법안 제18조는 9인의 심의위원 중 3인을 대통령이 직접 위촉할 수 있도록 정한 것뿐만 아니라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위원회 내부의 호선이 아니라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정하고 있다.

또한 기존 방송위의 심의위원제도와는 달리 위원장은 상임으로 두도록 하고 있다. 그 위원장은 법안 제26조에 따라 사무총장의 임명권을 가지게 된다. 결국, 대통령이 위원장을 지명하고 위원장이 사무총장을 임명하는 식이며, 이는 유일한 상임위원인 위원장과 사무총장이 심의업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독식 구조를 만들고 만다.

이는 각계의 추천을 통한 비상임 심의위원들로 구성되는 현행 방송위 심의제도보다도 퇴행적인 것으로 정치권력의 노골적인 간섭과 영향력에 대단히 취약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이 같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과연 방송의 공공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 단체는 야당 측 추천 상임위원을 두는 방식 등으로 독식 구조를 막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한나라당이 발의한 방통위 설치법안이 정책과 규제를 분리했으며, 독임제 부처로의 방송통신 정책권 환수라는 시대착오적 조치와 과감하게 선을 그었음을 환영한다.

그러나 합의제 위원회로서의 방송통신위원회가 진정 방송의 독립성을 보장하는 민주적인 정책기구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설치법안의 독소조항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제 이 막중한 과제는 국회의 몫이다. 우리 단체는 방송통신위원회가 국민에게 부끄럽지 않고 역사에 후회 없는 결과물로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바란다.

2008년 1월 25일

(사) 민주언론시민연합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