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문재인 대통령의 수출규제 철회요구에 즉각 거부의사를 밝혔다. 그러면서 황당무계한 주장을 들고 나왔다. 일본에서 수입한 전략물자가 북한의 무기로 사용됐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불화수소가 북한을 포함한 유엔 결의 재제 대상국으로 유출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일본의 주장을 일축했다.

한겨레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NHK 방송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의 주요 이유로 “안보상 부적절한 사례가 여러 차례 있었고, 사린가스 전용을 그 한 이유로 설명했다”는 익명의 정부관계자를 인용했다고 보도했다. 물론 그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JTBC <뉴스룸> 보도화면 갈무리

일본 정부가 범용적인 용어인 화학무기라는 말 대신에 특별히 사린가스를 언급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은 사린가스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갖고 있다. 1995년 옴진리교에 의한 사린가스 테러 때문이다. 도쿄 지하철역에 살포된 사린가스로 인해 13명이 사망하고, 6200여 명이 피해를 입은 끔찍한 테러였다.

그런 사린가스가 북한으로 넘어갔다는 주장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북한과 사린가스라는 두 개의 공포를 끌어들이는 노림수를 갖고 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군중을 선동했던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근거 없기는 마찬가지다.

전쟁을 할 수 없는 일본에서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일본으로 회귀를 노리는 아베정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의 존재이다. 일본인들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두 개의 공포를 소환하는 사린가스 운운을 통해 적의 존재를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수출규제와 사린가스 전용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물론 단기적으로는 7월 참의원선거를 노린 것이지만 멀게는 한국을 더 적대화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북한과 평화적 노력을 기울이는 한국을 위험한 북한과 동일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가능하다. 적의 동지는 적이라는 논리를 주입하려는 것이다.

MBC <뉴스데스크> 보도화면 갈무리

그런데 일본이 이런 주장의 근거로 ‘조선일보’를 언급한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MBC <뉴스데스크>는 9일 후지테레비에 출연한 일본 자민당 오노데라 이쓰노리의 영상을 전했다. 국방장관을 지낸 오노데라 이쓰노리 일본 자민당 안보조사회장은 “조선일보 기사 중에서 올해 5월이라고 보고받았습니다만, 대량 파괴에 전용 가능한 전략물자가 한국에서 위법으로 유출되는 게 급증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포털에서 검색해보면 지난 5월 조선일보 “대량 살상무기로 전용 가능한데...한국, 전략물자 불법수출 3년새 3배”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생화학무기 계열 70건 최다...제3국 경우 북·이란에 갔을수도”라는 부제가 붙었다.

이 기사를 일본 좋으라고 쓴 것은 아니겠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가려운 곳을 긁어준 셈이 됐다. 8일 조선일보가 사설로 웬일인지 “한국이 북에 독가스 원료 넘겼다는 일본, 근거를 대라”고 분노한 이유가 설명이 된다. 조선일보 사설은 “일본은 이웃 나라에 대한 경제 보복을 합리화하려고 가짜 뉴스까지 동원하는 나라가 됐나”라고 글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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