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그야말로 역사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미국 대통령이 북한 땅을 밟는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이 ‘트윗’으로 시작됐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다. 기성 외교전략에 얽매이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스타일이 만든 현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비무장지대 방문 등을 오랜 기간 계획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의 반응을 보면 적어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동 제안은 전격적이고 즉흥적으로 이뤄진 걸로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자신과의 만남을 언급한 트윗을 보고 깜짝 놀랐다며 이날 오후 공식 문서를 받고서야 제안을 확신하게 됐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실제 북한은 트럼프 대통령이 트윗을 올린 뒤 5시간 후에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명의로 “흥미로운 제안”이라며 “공식 제안은 받지 못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29일 당일까지 북한도 정상 간 회동이 실현될지 여부를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한 정부나 트럼프 대통령의 참모진 및 경호팀의 대응도 이 가능성을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이 실현된 것은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김정은 위원장 입장에서는 북미대화의 동력을 되살리기 위한 계기가 절실했고,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재선을 겨냥한 대외적 이벤트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간 북한은 하노이 회담의 실패로 훼손된 김정은 위원장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내부 단속을 모색하며 단거리 미사일 발사 등 저강도 도발을 감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북미대화에 나서기 위해서는 나름의 명분과 조건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최선희 제1부상이 군부 등 내부에 비핵화 반대 여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던 것은 이런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친서를 교환하고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특별대표가 “동시적 병행적 진전”을 언급하면서 공간이 다시 열렸다. 북한은 내부적 차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원하며 굳이 비무장지대까지 찾아왔다는 사실을 비핵화 협상에 다시 나서기 위한 명분으로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 1일 조선중앙통신은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동 사실을 전하며 북미 간 대화의 재개를 공식화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0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 집에서 나오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관점에서는 사정이 좀 더 복잡하다. 미국 정치는 2020년 대선을 향한 본격적인 경쟁구도에 진입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지지층의 유실을 최대한 방어하면서 충성도를 끌어 올리는 것이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층이 가장 관심을 갖는 주제는 중국과의 무역 협상과 이민자 문제이다. 냉정히 말해 북핵 문제는 미국 정치의 ‘메이저 이슈’로 보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이 비무장지대를 통해 국경 장벽을 언급한 것에서도 이런 현실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과의 만남을 추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G20 회의에서 미국과 중국이 무역 문제와 관련한 임시 휴전에 합의한 사실을 함께 볼 필요가 있다. 미중무역전쟁은 트럼프 대통령 지지층들의 환호를 불러 일으켰지만 동시에 무역마찰 그 자체로 인한 경제적 고통을 가중시켰다.

그런데 중국은 G20회의 기간 중 미중정상회담 직전 외국자본 진입 및 수입 확대, 관세 인하 등의 대외개방조치를 발표했고 미국산 대두 54만4천톤 수입을 결정했다. 전자는 자유무역의 원리를 확고히 지지한다는 명분을 확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트럼프 대통령 주요 지지층의 한 축이 농민이라는 사실을 겨냥한 걸로 해석된다. 즉, 트럼프 대통령에게 실리를 안긴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조치가 실리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중국과 화해하는 모양새 자체가 크게 이슈가 되는 것은 부담이다. 중국이 지재권 및 기술이전 등에 대한 제도적 변화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관세 부과 방침을 철회하는 것은 지지층에 중국에 대한 공세의 약화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바로 이런 조건에서 언론의 관심을 한반도 비무장지대로 옮긴 것이다.

여기까지의 상황을 정리해보면 비무장지대에서의 북미 정상 간 회동이 일회적 이벤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가능성을 우려하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2, 3주 간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한 팀을 꾸려 북한과 실무협상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영변 핵 시설의 폐기 또는 불능화 및 사찰 수용이라는 조건으로는 합의가 어렵다는 미국 실무진들의 견해 자체는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실무협상은 난관일 가능성을 언급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물론 실무협상의 차원에서도 이번 회동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하노이 회담에서 거부당한 제재 완화가 아니라 안전보장에 방점을 찍는 새로운 접근을 모색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푸틴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이 전해준 말의 공통점은 김정은 위원장의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안전에 대한 보장”이라고 말해 이런 해석을 뒷받침했다.

그런데 미국 대통령이 직접 비무장지대를 방문하고 북한 땅을 밟은 것은 ‘안전보장’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중요한 상징적 조치이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사실상 종전선언을 천명한 역사적인 날”이라고 평가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따라서 비무장지대에서의 북미 정상 간 회동은 앞으로의 실무협상 과정에서 기존의 요구사항인 제재완화를 개성공단 가동 재개 등 남북경협으로 대체하고 대신 미국이 안전보장과 관련한 좀 더 진전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안전보장’에 관한 대목에서 우려가 되는 것은 미국이 이와 관련한 외교안보적 조치를 시행하는 것과 주변국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이번 회동에 대해 떨떠름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에 대한 협조 의사를 밝힌 것도 중국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미일안보조약의 개정 압력을 받고 있는 일본이 북일관계 개선이라는 의제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지도 지켜볼 문제이다. 주변국들의 움직임이 가속화 되면 남한 정부의 ‘촉진자’로서 지렛대는 약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북미대화를 중재하는 역할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야 한다. 북핵 문제의 해결이 동아시아를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만드는 결과를 만드는 게 아니라 지역 내의 평화체제 구축 논의로 이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노력이 더해져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한다면 미국 대통령의 비무장지대 방문은 가장 바람직한 의미로 역사에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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