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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드’- 개인의 존엄과 관계, 거장 미카엘 하네케가 그린 2019년의 현실[미디어비평] 톺아보기
meditator | 승인 2019.06.30 11:21

은퇴 후 한적한 삶을 이어가던 조르주와 안느 부부, 그 평화로운 삶에 '도둑'처럼 아내 안느의 병이 찾아온다.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돌보는 일은 온전히 남편 조르주의 몫. 아내는 그런 남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야 하는 게 수치스럽고, 남편은 이제 정신조차 온전하지 못하게 된 아내를 감당해야 하는 게 버겁다. 그러나 정작 딸마저도 그런 두 사람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들에게 닥친 잔인한 운명에 남편 조르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여기까지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2012년작 <아무르>의 이야기이다. 존엄을 지키고 싶지만 노년을 덮친 병마로 인해 '존엄'도 '관계'도 허물어져 가는 노부부. 그 가운데 남편의 극단적 선택을 감독은 역설적인 제목 '아무르'로 설명해냈다. 이 작품으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2013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비롯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적 찬사를 받았다. 

<아무르> 이후 

영화 <해피엔드> 스틸 이미지

남겨진 남편은 어떻게 되었을까? 바로 이게 <해피엔드>를 여는 질문이다. <아무르>에서 음악가인 남편 역을 맡았던 배우 장-루이 트린티냥이 전작에 이어 칼레 지역의 성공한 부르주아 '로랑' 가문의 아버지로 돌아왔다.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아내를 보낸 남편 조르주에게 점점 아내와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명색이 로랑 가문의 수장이지만 이제 실질적인 일은 딸 앤의 몫이다.

그런데 <해피엔드>의 이야기는 각도를 좀 튼다. 그리고 지평을 넓혔다. 로랑 가문에 새로운 일원이 등장한 것이다. 바로 외과 의사로 일하는 아들 토마스(마티유 카소비츠 분)의 딸 '에브(팡틴 아후뒤엥 분)'이다. 전처와 함께 살던 딸은 그 전처가 약물중독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면서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엄마가 아파서 아빠 집으로 온, 아니 사실은 딸인 자신을 방치하고 외면하는 엄마에게 약을 먹이며 그 과정을 자신의 SNS에 중계한 '이상 심리'을 보이는 소녀 에브는 지금처럼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SNS에 보고하는데, 그러면서 로랑 가문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병으로 무너진 개인의 존엄의 문제를 다뤘던 <아무르>. 하지만 노부부, 나아가 그 개인의 존엄이라는 '실존적 문제'는 로랑 가문이라는 가족의 관계로 위상이 바뀌면서 '관계'가 무색하게 흐트러져 버린 현대 '가족'의 민낯이 드러난다. (*이하 영화 <해피엔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음만이 해피엔드? 

영화 <해피엔드> 스틸 이미지

아내를 그렇게 보낸 아버지 조르주 로랑은 아내와 같은 그림자가 자신을 드리워가는 걸 절감하며 스스로 자신을 '처리'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한밤중에 조용히 차를 몰고 나가 나무에 돌진한다거나, 그 사고로 인해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발을 위해 찾아온 이발사에게 자신을 죽여줄 것을 문의하는 등 그의 모든 촉각은 스스로 존엄할 수 없는 자신의 죽음으로 향해 있다. 가족에게는 가문을 대표하는 어른이지만, 그런 가족의 기대는 이제 조르주에게 번거로울 뿐이다. 

병든 아내의 말년을 책임진 아무르처럼, 손녀 에브도 엄마를 '책임'졌다. 일찍이 여름캠프에서 친구에게 시험해 본 방식으로, 자신이 기르던 엄마가 싫어하는 애완동물에게 실험해 본 그대로 엄마에게 실행한 것이다. 엄마와 딸의 관계라지만 에브가 아주 어릴 때 오빠의 죽음 이후로 무너져 버린 가정. 아버지는 집을 떠났고, 엄마는 딸을 방치하고 외면했으며 우울증에 허덕였다. 그리고 그 결말은 이제 막 소녀 테가 나기 시작한 에브로 하여금 할아버지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소녀가 감당할 수 없었던 모녀 관계에 대해 소녀가 선택한 최선의 '해피엔드'였을까? 

할아버지와 손녀의 같은 선택, 그리고 이제 또 할아버지와 손녀는 같은 곳을 바라본다. 존엄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끝내기 위해 고심하는 할아버지와, 엄마와의 전쟁 같은 생활을 끝내고 비로소 가족다운 가족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한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하는 에브. 

로랑 가문으로 들어온 에브가 다시 한번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계기는 '아버지'이다. 죽은 오빠 대신 새엄마가 낳은 동생도 생기고, 그 동생을 이젠 자신이 돌봐주겠다며 의지를 다졌던 에브. 하지만 아버지는 바람을 피우며 모처럼 맞이한 에브의 평안에 위기를 드리운다. 더는 누구를 죽이며 행복을 추구할 수 없는 에브는 그래서 이번엔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이 위태로운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다른 가족이라고 나을까. 아버지 대신 사업을 돌보는 딸 앤은 모든 촉각이 일로 수렴된다.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아들 피에르(프란츠 로고브스킨 분)를 승계자로 만들기 위해 다그친다. 하지만 사업을 위해 사랑도 기꺼이 이용할 줄 아는 앤과 달리, 유약한 피에르는 사업에 의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알콜 의존적이다. 

사고를 내서 휠체어에 의지하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성대하게 치러진 조르주의 생일 파티, 그리고 이어진 앤의 약혼 파티. 도시의 명사들이 초대된, 남 보기엔 부러울 것 없는 한 도시의 내로라하는 가문, 그러나 정작 자신을 내버려두라며 난리를 치다 어머니의 약혼에 이민자들을 초대하여 백인 부르주아 파티였던 약혼식장에 찬물을 끼얹은 피에르의 해프닝을 뒤로 하고, 조르주는 손녀 에브에게 조용히 자신의 휠체어를 밀게 한다. 바다를 향해서. 

영화 <해피엔드>포스터

개인적인 존엄과 실존의 문제였던 <아무르>의 죽음은 이제 그 파장이 ‘가족’으로 확대되며 개인을 넘어선 관계에 대한 회의로 넘어간다. 한 지방의 명망 있는 가문이라 일컬어지는 로랑 가문, 하지만 그 가문의 실상은 피폐하다. 스스로 아내를 죽인 할아버지, 엄마를 죽인 손녀, 가정이 있지만 변태적인 섹스에 탐닉하는 아버지, 부도덕한 방식도 마다하지 않는 워커홀릭 딸, 그리고 약물 중독인 손자. 아니 더 심각한 문제는 저마다를 짓누르는 문제가 가족 관계를 통해 전혀 소통되거나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손녀 에브는 가족과 소통할 수 없는 걸 엄마에게 했던 행동을 중계하듯 SNS에 중계하며 아이러니한 집착을 보인다. 

<아무르>에서 실존의 고민은 피폐한 결론이었지만 존엄을 향했다면, 이제 시간이 흘러 <해피엔드>로 오면 개인의 존엄은 관계 속에서 더욱 피폐해지고 고립되어 드러난다. 가족은 존재하지만 소통하지 않고, 현대 사회의 SNS는 소통하지만 치유하지는 못한다. 거장 미카엘 하네케가 그린 2019년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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