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배우들이 모였다. 다이안 키튼 1946년생, 캔디스 버겐 1946년생, 메리 스틴버겐 1953년생, 그리고 제인 폰다 무려 1937년생. '노익장'이란 말이 무색하게 그들은 여전히 진행형인 'old age'의 성과 사랑, 그리고 삶을 당당하게 어필한다.

old age, 노년기.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정상적인 인간의 일생에서 마지막 단계이다. 나라마다 혹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언제부터가 노년기인지는 달라진다. 빨리는 40대 중반부터도 노년기로 잡는 사회도 있지만 대체로 60세, 65세 이상의 인구를 '노년기'라 보고 있다. 고대 로마나 중세 때만 해도 인간의 수명은 20~30세였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달로 오늘날 old age 세대는 폭발적으로 증가, 100세를 고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 시절이 되었다.

나이듦에 따라 지각은 물론 신체적 능력이 한층 저하되어 노화로 인한 다양한 질병을 앓게 되며 사회적 활동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세대. 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생의 마지막 단계인 이 세대의 '기간'을 점점 더 늘려고 있다. 그와 함께, 죽음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세대의 위상도 달라지고 있다. 영화 <북클럽>은 바로 이렇게 달라지고 있는 'old age'의 삶을 성과 사랑이라는 각도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레이가 분출시킨 old age의 욕망

영화 <북클럽> 스틸 이미지

여기 20대부터 40년의 우정을 쌓아온 네 명의 여성들이 있다. 다이앤(다이안 튼 분), 비비언(제인 폰다 분), 샤론(캔디스 버겐 분), 캐롤(메리 스틴버겐 분), 이 네 여성들 우정의 매개는 '책'이다. 풋풋했던 젊은 시절 한 달에 한번 만나 책을 읽으며 교양을 쌓아가던 우정을 40년 시간 동안 한결같이 이어오고 있다.

20대에서 훌쩍 흘러버린 40년의 시간, 그 시간만큼 그들의 삶과 존재도 달라졌다. 숱한 남성들을 매혹시켰던 비비언은 한 남자에게 정착하는 대신 당당한 호텔 CEO가 되었다. 샤론은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법대 학생이었던 그 이력을 이제 연방 판사로 승화시켰다. 캐롤은 큰 레스토랑을 운영한다. 주부였던 다이앤 역시 딸 둘을 잘 키워냈다. 책이 매개가 된 우정, 그건 일정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던 그녀들의 삶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제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남은 다이앤에 대해 그녀의 안위를 딸들이 노심초사 걱정하는 나이가 되었다. 딸들은 아빠도 없이 홀로 큰 집을 유지하며 엄마가 어떻게 사시겠냐며 멀리 떨어진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엄마를 모시려 한다.

그럴 즈음, 여전히 남성들을 갈아치우며 데이트를 즐기는 비비언이 2011년 e.l 제임스가 쓴 에로틱 로맨스 소설을 모임의 다음 책으로 선정한다. '남사스럽게' 어떻게 그런 책을 읽느냐는 샤론의 투정은 묵살되고 다음 달의 책으로 선정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영화 <북클럽> 스틸 이미지

왜 하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였을까? 이미 같은 해 로버트 레드포드의 노익장을 한껏 발휘한 영화 <미스터 스마일>을 제작했던 빌 홀더먼 감독은 어버이날 선물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어머님이 재밌게 읽는 걸 보고 <북클럽>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빌 홀더먼 감독의 경우만이 아니다. 사디즘과 마조히즘적 노골적인 성애 모사를 한 이 책이 서구 중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베스트셀러가 되며 '엄마 포르노'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바로 그렇게 중년 세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북클럽> 속 여성들 욕망의 지렛대로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지렛대의 역할은 성공적이었다. 우리 나이에 무슨 그런 책을 읽느냐고 했던 친구들은 모두 그 책에 푹 빠져버린다. 빠져버리는 것만이 아니다. 그 책에 등장했던 성적 욕망에 대한 저마다 해프닝을 벌이며 '숨겨왔던 나의' 욕망에 눈을 뜬다.

근엄한 연방 판사인 샤론, 그러나 그녀의 삶은 오래도록 싱글이었다. 15년 전 남편과 이혼했던 그녀는 이제 아들과도 전화 한 통 겨우 하는 사이이다. 하지만 여전히 남편의 근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그녀가, '그레이' 덕분에 데이트 사이트를 클릭한다. 은퇴한 남편과 사는 캐롤은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남편과의 섹스를 도발하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여기까지만 봐도 1994년부터 여러 시즌에 걸쳐 제작된, 성담론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네 여성들의 삶을 다루었던 <섹스 앤더 시티>와 구성이 비슷하다. 그런데 당시 <섹스 앤더 시티>는 왜 그토록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여성들에게 센세이셔널한 화제작이 되었을까? 그건 그저 성을 담론으로 했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그 '성'이 드라마의 주된 소재였다는 게 인기의 주요인 중 하나이기는 하다.

아직은 길 위에 있는 old age를 위하여

영화 <북클럽> 스틸 이미지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성을 매개로 하여, 전문직 여성들의 주도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그려냈다는 게 핵심이다. 즉, 성적 욕망은 다른 말로 바꿔 표현하면 여전히 적극적이고 주제척인 자기 삶에 대한 욕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년이라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누가 봐도 'old age'인 네 친구들의 북클럽에서 '그레이'를 매개로하여 드러내 보인 성적 욕망은, 죽음을 기다리는 삶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삶의 여정에 서있는 old age를 말한다.

영화 속 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딸들이 사는 지역으로 가게 된 다이앤. 딸들은 엄마는 힘들 테니 여기서 기다리라며 백화점 1층에 엄마를 놔둔 채 2층 쇼핑을 하러간다. 엉거주춤 1층 계단 옆에 마련된 마사지 의자로 간 엄마, 그 대기 의자에는 자기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인들이 실신하다시피 앉아있다. 그런 노인들에 비하면 아직은 한참 '영'한 다이앤. 그러나 딸들은 그런 엄마를 마사지 의자에 의탁한 노인 취급을 하며 자기 집 지하에 방을 마련해 줄 테니 와서 지내라며 보호를 자청한다.

영화 <북클럽> 스틸 이미지

영화에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등장한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자기 앞에 놓인 있는 두 가지 길 중에 하나의 길을 가본 사람이 회고하는 길, 즉 삶에 대한 감상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르지 않아 보이는 두 길 중 한 길을 갔노라고 하는 시. <북클럽>은 아직은 마사지 의자에 기탁할 나이가 채 되지 않은 현역 'old age'들을 등장시키며, 아직은 그들이 길을 회고할 처지라기보다는 자신 앞에 놓인 있는 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나이라고 '단언'한다.

<섹스 앤더 시티>의 시작이 섹스였지만 결국은 도시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었듯이, <북클럽> 역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로 도발된 네 여성의 성적 욕망은 결국 그녀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도전으로 마무리된다. 딸들이 마련한 지하 방에서 딸들의 아이 돌보미로 나머지 인생을 보내는 대신, 자가용 비행기를 가진 새 애인과의 미지에의 도전을 선택한 엄마 다이앤. 늘상 애인을 갈아치우는 듯했지만 사실은 자신의 직업적 성공을 위해 사랑을 도피해온 비비안의 늦지 않은 사랑. 어엿한 연방 판사에 싱글이 된 지 1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얽매여왔던 전 가족관계의 사슬에서 이제는 자유로워진 샤론. 그리고 성을 넘어 부부로서의 신뢰를 회복한 캐롤까지 그녀들의 삶은 다시 새로운 시작을 열며 마무리된다.

'old age' 예전 떠들썩하게 치렀던 환갑잔치가 이젠 민망해진 시절, 100세 시대에 old age는 그저 한 세대로 뭉뚱그리기엔 다양한 욕망을 가진 존재라고 영화는 말하는 듯하다. 여전히 욕망할 것이 남아있는 old age, 휴식이 아니라 ‘살아가야 할’ 과제가 남아있는 진행형의 삶으로서 <북클럽>은 정의한다.

영화 <북클럽> 포스터

물론 <북클럽> 속 이야기는 보고 싶은 것만 보여준 '판타지 로맨스'의 측면이 강하다. 등장하는 네 주인공들은 중산층 이상의, 한 달에 한 권 정도 책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여성들이다. 그녀들에게 보정 속옷이 문제가 될지언정 노인들의 친근한 질병인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은 기색조차 없다. 여전히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이스크림 한 통은 거뜬히 해치울 수 있는 건강 상태이다. 그뿐만 아니라 노년을 괴롭히는 실존의 문제인 경제력은 그녀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식들은 부모에 기생하는 대신, 전화 한 통으로 결혼을 통보할 정도로 너무도 독립적이거나 심지어 엄마를 못 돌봐줘서 안절부절못한다.

우리네 'old age'가 겪는 상당수의 문제들은 자취도 드러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60중반이 되어서도 여전히 현역이어야 하고 사랑도 해야 하는 삶의 여정이 정열적이기도 하지만, 참 인생이 길다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팔팔한 old age에게는 주체적 삶에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만한 '비타민' 같은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그 비타민의 상표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인 폰다, 다이안 키튼, 캔디스 버겐이었기에 더욱 개연성 있게 다가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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