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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방인 청년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려줄 때[여해, 바다와 같아라]
백종훈 원불교 교무 | 승인 2019.06.19 11:13

미하일 압데예프. 그는 모스크바 국립대학을 나온 화학박사다. 2008년 여름, 전라북도 진안 만덕산에서 내 또래의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출가하여 원신영이라는 법명을 가진 예비교무 신분이었고 나는 고단한 서울살이에 지쳐 한 달을 기약하고 만덕산에 숨어든 피폐한 손님이었다. 원불교를 처음 접한 내게 모든 것이 생소했다. 낯선 용어, 낯선 말투, 낯선 차림새, 낯선 분위기... 풍광마저 눈에 설었다.   

유창하게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는 누구에게나 돋보이는 존재였다. 호기심어린 눈길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다. 보드카에 만취해 해롱거리는 자신의 옛 사진을 꺼내 교도들에게 보이며 원불교 마음공부를 통해 술의 노예에서 헤어났다고 고백하는 그는 꾸밈없고 수수한 구도자였다.

한편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말도 안 되는 미국의 거짓말이라며 이유를 들어 설명하거나, 맥주를 많이 마시면 홉(hop)에 들어있는 여성호르몬 때문에 여자처럼 가슴이 나온다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장면에서 그는 영락없는 과학자였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서 작곡한 노래를 기타연주하며 들려주곤 했다.

16일(현지시간) '범죄인 인도 법안'(일명 송환법)에 반대하는 홍콩 시위대 중 한 명이 '송환법 반대' 고공농성을 벌이다가 추락사한 시민을 추모하는 꽃다발을 들고 있다. (홍콩=연합뉴스)

이방인이었던 나는 그와 어울릴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길게 옆으로 늘어선 수돗가에서 우연히 둘이 나란히 서서 손을 씻게 되었다. 어색함을 깨려 가벼운 인사에 곁들여 수줍게 말을 붙였다. 

“저 러시아 노래 하나 아는데요.”
“그래요?”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오른다.
…중략…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백만송이 장미’를 예상했을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사는 비록 다르지만 소비에트연방 시절 들었던 노랫가락이라고 했다. ‘인터내셔널가’는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민중가요로 원곡은 프랑스어로 만들어졌고 러시아어판은 한때 소련의 국가였다. 

민중가요를 다른 장르보다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가사 외기를 그토록 힘겨워하는 내가 흥얼거릴 수 있는 두 곡이 있으니 바로 ‘인터내셔널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사회적 약자를 일으키고 소외된 이웃 곁에서 힘이 되어주는 이들.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사람이 모인 거리에서 광장에서 현장에서 울려 퍼진 ‘인터내셔널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은 소심하고 나약한 어린 내 가슴을 달궜었다.

15일 저녁 '송환법' 반대 어머니 집회에 참석한 어머니들 (로이터통신=연합뉴스)

최근 홍콩의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집회 중, ‘2014년 홍콩 우산혁명’을 기리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개사한 ‘우산 행진곡’을 홍콩시민들이 불러 한국에서 새삼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 홍콩, 대만, 태국, 캄보디아 등지의 시위현장 곳곳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랫말을 달리하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다. 이렇게 ‘임을 위한 행진곡’은 아시아에서 민주·노동·평화·인권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아시아의 역사도 큰 맥락에서 한 덩어리로 움직인다. 한국과 중국의 예를 보더라도, 1851년 태평천국운동, 1894년 동학농민전쟁, 1919년 3·1독립투쟁, 같은 해 5·4운동, 1980년 광주 5·18, 1987년 유월항쟁, 1989년 유월 천안문 학살, 2014년 홍콩 민주화운동,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 2019년 홍콩 우산시위에 이르기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이지 않게 서로를 견인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러한 흐름은 도도하게 이어질 것이다. 불의에 저항하는 아시아 시민을 한 마음으로 묶어내는 데 ‘임을 위한 행진곡’이 함께하리니, 그 과정 과정에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은 거센 탄압에 잠시 무너질지언정 더 넓고 더 깊게 아시아인의 삶에 뿌리내리리라 믿는다. 

미래의 어느 날, 당신에게 이국에서 온 한 젊은이가 다가와 한국노래 하나를 안다고 말을 건넬지 모른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방탄소년단의 노래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지 말자. 그가 모국어 버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려줄 때, 언젠가 그의 심장을 뜨겁게 뛰게 했을 정의감, 용기 그리고 정열도 놓치지 않고 알아볼 수 있는 눈 밝은 우리였으면 한다.  

백종훈 원불교 교무  webmaster@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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