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이희호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이 세상을 떠났다. 이희호 이사장은 민주주의와 여성인권, 평화에 생을 바친 인물로 평가된다. 이희호 이사장의 별세로 국내외의 정치적 교착국면이 풀리는 새로운 계기가 만들어질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고인이 힘써온 분야에서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보다는 시대적 모순이 더 드러나는 현실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관심을 갖는 현안은 크게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이희호 이사장이 세상을 떠난 일을 계기로 국회 정상화의 물꼬가 트이느냐이다. 이희호 이사장의 빈소에 온 주요 정당의 원내지도부들이 가장 많이 받은 질문도 이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자유한국당의 주요 인사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그 참모들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거리를 둬왔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해왔다. 최근 극단적 언어를 연이어 구사해 악명이 높은 민경욱 자유한국당 대변인도 “고인께서 민주주의, 여성 그리고 장애인 인권운동을 위해 평생 헌신했던 열정과 숭고한 뜻을 기리며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논평했을 정도이다. 따라서 이희호 이사장의 별세가 자유한국당이 ‘결단’을 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게 여의도 인사들의 기대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여야의 국회정상화 논의가 타결에 임박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최대 쟁점인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 처리 방식을 놓고 여당과 자유한국당 사이의 입장 차이가 상당히 좁혀졌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합의문에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을 “합의 처리 한다”는 문구를 넣을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합의 처리를 위해 노력한다”, “합의 처리를 원칙으로 한다”는 선에서 물러나지 않고 있다.

일부 보도에 의하면 더불어민주당이 기존 입장에서 좀 더 후퇴한 새로운 표현을 제시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중요한 것은 문구가 아니라 민주당의 의지”라고 했다고 한다. 국회 정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물밑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대를 가져볼만도 하다.

이희호 이사장이 힘을 써 온 또다른 분야인 한반도 평화에 있어서도 새로운 가능성이 엿보인다.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할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북한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당시 고위급 당국자로 구성된 조문단을 파견했었다. 이희호 이사장 역시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당시 방북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한이 이번에도 조문단을 파견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때문에 이를 계기로 최근 인도적 지원 등 논의에도 꽉 막힌 상태였던 남북 간 대화에서 새로운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기대를 가져볼만한 또 하나의 일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친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3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가능성에 대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어느 시점에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대북매파의 대표적 인물로 잘 알려진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3차 북미정상회담의 개최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이런 기류는 하노이 정상회담에서의 합의 결렬 이후 북한이 내부 단속 등을 끝내고 미국을 상대로 한 협상에 다시 나설 준비를 어느 정도 마친 게 아니냐는 추정을 뒷받침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를 근거로 가을이나 연말께에는 북미 간 대화의 구체적 성과가 나올 수 있다는 전망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

11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희호 여사의 빈소 모습. (연합뉴스)

물론 북한의 조문단 파견과 북미대화 재개가 이희호 이사장이 바랬던 한반도 평화 체제의 안착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북한이 남북 간 대화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조건 자체가 변화한 것은 아니라는 점과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의 무역전쟁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고 재선 전략에 명확히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서지 않으면 북미대화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은 앞으로의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근거이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비핵화 문제에 대해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하고 우리 정부도 당사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정치적 역량을 활용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즉, 여전히 한반도 평화 정착의 문제는 당사자들의 노력에 달려있다.

이희호 이사장이 일생을 바친 민주주의의 문제에서도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청와대는 자유한국당 정당 해산 청원에 대한 답변에서 “우리 정당과 의회정치에 대한 국민의 준엄한 평가가 내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면서 국회가 추경안 처리나 법안 통과 등에서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이 국회에 복귀하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위기가 해소된다고 볼 수는 없다.

이희호 이사장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싸우던 시대에는 정통성 없는 권력이 독점한 주권을 국민에게 되돌려 주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실현이 가능하다고들 보았다. 하지만 대의민주주의가 사회 운영의 원리로서 성공적으로 정착되고 인터넷의 발달이 정보의 빠른 교환을 가능케 한 오늘날엔 대중이 어떻게 민주주의적 소양을 갖출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것은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확립이 됐더라도 오히려 이것이 소수자에 대한 혐오 등에 기반한 극우정치의 자양분이 되는 현상이 전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적 인물로서 이희호 이사장을 규정하는 처음과 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여성 인권에 대한 퇴행적 공격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 남성의 여성주의에 대한 거부감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기는 사회적 모순의 원인을 지배층의 엘리트 정치가 아닌 소수자 권리 신장에서 찾은 결과이다. 이러한 사회적 귀인 오류를 제대로 바로 잡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구현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희호 이사장의 이상과 신념을 계승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정치권과 언론도 이런 점에 주목해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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