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일, 박창진 그리고 서지현. 이들의 이름은 매우 유명하다. 자본주의사회에 유명하다는 것은 부와 명예가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종교보다 강하다는 자본주의 논리도 비켜가는 일이 있다. 이들은 영웅이다. 국정농단의 실체를 폭로하고, 재벌의 갑질을 세상에 알리고, 검찰이라는 무소불위의 조직에 기생하는 야만을 고발했다.

이들이 이룬 공적인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는 분명 전보다 나아졌다. 정의를 바로세울 수 있게 했다. 정의란 무엇인가. 매우 어려운 명제지만, 간단히 하자면 범죄자를 엄하게 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공익제보는 대통령 권력, 재벌권력 그리고 검찰권력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훈장을 받고, 그 공로로 평생을 편히 살 상금을 받아도 부족하다.

KBS1 <거리의 만찬> "나는 고발한다" 편

그러나 우리의 영웅들은 상은커녕 많은 곤란을 겪고, 집요한 음해와 싸워야만 했다. ‘고발은 짧고 고생은 길다’는 말이 그들 사이에 자조적으로 회자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 외에도 <거리의 만찬>이 만난 또 다른 공익제보자들은 하나같이 ‘해고 후 복직’이라는 프로필을 달고 있었다. 공익제보가 세상을 뒤흔들 부조리를 바로잡는 계기가 되었지만 정작 공익제보자 본인들은 바로 그 부조리한 세력에 의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해고 후 복직이 됐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겪는 어려움에 경제적 문제도 없을 수 없다. 인간은 항상 더 부유해지길 바란다. 그러나 공익제보자들은 해고와도 싸워야 할 상황이다. 가해자들이 이들을 괴롭힐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들을 금세 잊기 때문이고, 이들을 보호하고 더 나아가 대접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거리의 만찬>이 지난 2011년부터 2018년까지 공익제보자에게 지급된 보상금을 조사했다. 평균을 내니 1건당 겨우 96만 8,000원에 불과했다. 공익제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거대한 권력과의 싸움이다. 요즘은 뜸하지만 “자살당했다”라는 말이 한때 유행했다. 공익제보는 그런 위험과 공포를 이겨내야만 가능한 일이다. 거기에 96만원이라니.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다.

물론 공익제보자들이 경제적 보상을 위해 나선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96만원이라니, 이런 정도는 오히려 조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상금이 적은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명예를 훼손하는 수준인 것이다. 제도라는 것이 어차피 기득권자들에 의해 좌우되는 것인 만큼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 문제는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획기적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물론 야당이 또 발목을 잡더라도 이번 정부가 아니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거라는 기대를 갖지 못한다.

KBS1 <거리의 만찬> "나는 고발한다" 편

공익제보자들은 자신의 생계와 때로는 목숨까지 위협을 감수하고서라도 사회 정의를 위해 결단을 내렸다. 그런 그들이 적어도 부조리를 저지른 자들보다는 잘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그들을 잊지 않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물론 몇 개의 법이 만들어져 있다. 문제는 실효성에 있다. 96만원이라는 터무니없는 보상금 액수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제도는 공익제보를 권장하지 않는다.

공익제보자가 등장할 때마다 언론들은 온갖 정의감을 다 발휘해 사건을 보도한다. 그러나 정작 공익제보자들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과 당연히 받아야 할 공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거리의 만찬>이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공익제보에 대해 허술하다 못해 기본조차 갖춰지지 않은 제도에 대해 고발하게 된 것은 당연하면서도 의외의 접근이었다.

그리고 공익제보자들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이들의 미래에 대한 음해이다. 이들이 나중에 정치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을 하는 것이다. 국정농단을 무너뜨리고, 재벌을 혼내고, 검찰조직의 범죄를 고발한 이들만큼 정치를 할 자격을 갖춘 이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이들에 대해 가해를 포기하지 않는 권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부분일 수도 있다. 공익제보자에게 정치는 터부가 아니라 선택의 하나일 뿐이다. 지금의 정치인들 면면을 봐서는 이들이 국회의원이 빨리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