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분, 세 시간 여라기에 지레 걱정을 했다. 그런데 기우였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181분이라는 시간이 두 시간 정도로밖에 안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 수많은 등장인물,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어벤져스를 이끌어왔던 쟁쟁한 히어로들의 들고 남을 산만하지 않게 하나의 서사 안에 꾸려 넣은 '편집'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엔드게임'으로서 어벤져스가 빛을 발한 건 물량을 쏟아 넣은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다. 블록버스터도 결국 승패를 가름하게 만드는 건 철학적 세계관과 그것을 풀어내는 ‘서사’에 기인한다는 걸 마블이, 안소니 루소, 조 루소 형제가 다시 한번 증명해냈다는 것이다.

인피니티 워, 신이 되고자 한 빌런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블록버스터 영화는 거개가 외계인의 침공이라든가 지구를 뒤덮는 자연 재해라든가 하는, 지구에 대한 가공할만한 종말론적 위협으로 시작된다.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궁극의 위협을 가져온 건 바로 '타노스', 외계 빌런이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우주의 힘이 담긴 인피니티 스톤 여섯 개를 담을 장갑, 인피니티 건틀렛을 차고 등장한 타노스. 그런데 이 외계 빌런은 뜻밖에도 스스로 '필연적인 존재(inevitable)'가 되고자 한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고정된 자원이 지구, 나아가 우주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는 '혜안(?)'을 가지게 된 타노스는 사랑하는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면서까지도 손에 넣은 여섯 개의 인피니티 스톤으로 지구와 우주를 구원하고자 무차별적인 '심판'을 행했다. 그리고 그 결과 지구는 물론, 우주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이런 일련의 타노스가 '행한 일'은 흔히 종말론적인 신앙에서 그려지는 전지전능한 신의 모습과도 같다. 타락한 인간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40일 밤낮으로 비를 쏟아 부었다던 신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그 일을 마친 타노스는 자신이 행한 '최후의 심판'을 거스를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다치면서까지 인피니티 스톤을 파괴했고, 그 모든 것이 끝난 뒤 마치 천지창조 뒤의 휴식을 취한 신처럼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 여유를 즐긴다.

그의 의도는 어쩌면 실현되었는지 모른다. 인간이 만든 문명과 배들로 즐비했던 뉴욕의 바닷가는 이제 고래들이 뛰노는 곳이 되었으니. 그가 바랐던 지구와 우주의 균형이 이루어져가는 것 같다.

그런데 감히 '지구의 한 줌도 안 되는 어벤져스' 무리가 양자물리학 따위를 동원해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그가 없애버린 그 '인피니티 스톤'을 모으고자 한다. 반을 살려놓았더니 사라진 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과거의 오류를 되풀이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 시간의 틈을 비집고 나온 타노스는 이번에는 다른 결정을 내린다.

'라그나뢰크(신들의 몰락)처럼 아예 기억할 존재들을 없애버리고 천지창조부터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타노스 그 자신이 '필연적인 존재'이기에 바로 그런 일을 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정의내린 '필연적인 존재', 지구어로 번역하자면 '신'이다.

인간의 역사, 어벤져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하지만 그런 필연적인 존재의 '전지전능한 작업'에 반기를 든 무리들이 있다. 바로 '어벤져스', 과학기술의 성과를 자신의 몸으로 증명한 아이언맨, 신화 속에서 튀어나온 토르, 과거의 냉동인간이 해동된 캡틴 아메리카, 과학적 돌연변이 스파이더맨, 헐크, 영성의 히어로 닥터 스트레인지 등등 인간의 상상력이 도출해낸 다양한 캐릭터의 히어로들. 하지만 그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일사분란하게 타노스에 대항했던 건 아니다.

에너지원 큐브를 이용한 적의 등장으로 지구가 위험에 처하자 국제평화유지기구 쉴드(S.H.I.E.L.D)의 국장 닉 퓨리(샤뮤엘 L 잭슨 분)가 어벤져스 작전을 개시, 아이언맨(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를 위시하여 캡틴 아메리카(크리스 에반스 분),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분), 헐크(마크 러팔로 분),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 분), 호크 아이(제레미 러너 분) 등을 호출하여 적들에 대항한 동맹을 결성한다.

하지만 이들의 동맹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토니 스타크가 개발한 평화유지프로그램의 오류로부터 탄생한 이 지구를 위험에 빠뜨린 적은 지금까지 지구 방위군으로 명성을 날렸던 어벤져스를 오히려 지구를 파괴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존재로 규정하며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구를 구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지구 파괴와 인명 피해를 양산하는 존재는 어벤져스 팀 자체 내의 '철학적 이견'을 발생시키며 어벤져스의 갈등과 해산을 가져온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이러한 갈등은 그저 블록버스터 히어로물의 서사적 갈등을 넘어, 지금까지 인류역사의 씨줄과 날줄이 되었던 인류사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타노스가 인류의 반을 절멸시켜 인류와 지구를 구원하고자 했을 만큼, 인류 문명의 발전은 또 다른 파괴와 폐해를 낳았다. 발전과 수호라는 이름으로 인류가 지구 곳곳에서 또 다른 '점령'과 '파괴'를 일삼아 왔다는 반성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스스로가 만들어낸 괴물 울트론과 맞서는 과정에서, 파괴에 대한 반성으로 통제를 선택한 아이언맨 등의 그룹과, 그에 맞서 통제를 벗어난 히어로들을 규합한 캡틴 아메리카의 그룹은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시리즈에서 갈등의 정점을 달한다. 하지만, 결국 타노스에 의한 인류 및 우주 절멸의 순간을 맞이하며 동지들을 잃게 되면서 다시 한번 힘을 모으게 된다.

인류가 사라진 곳에 숲이 무성해지고 고래들이 뛰어놀게 되었지만, 인류는 자신들의 반을 잊지 못한 채 상실의 나날을 이어갔다. 결국 인간의 삶을, 인류를 지탱하고 유지해 가는 건 관계, 그리고 그 관계들로 이루어졌던 '역사'였음을 증언하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다시 한번 과학의 힘을 빌어 '전지전능한 파괴'에 도전하여 연대한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 스틸 이미지

상실로부터 시작된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그 상실의 아픔을 필연으로 수긍하는 대신, 양자물리학이라는 최첨단의 과학을 끌어안으며 과거를 복구하고자 한다. 비록 폐해를 남발하는 인류의 역사였지만, 필연적인 존재의 심판 대신 그 불완전한 인간의 역사를 스스로 선택하고자 한 것이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절정을 이룬 타노스 대 어벤져스의 전투씬이 감동적일 정도로 다가오는 건, 그 씬에 쏟아 부은 블록버스터적 물량과 함께 그 최후의 전투를 위해 다져넣은 동지적 인류애에 대한 서사 때문이다. 뒤늦게 얻은 딸을 두고 나선 아이언맨의 결자해지,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진 블랙 위도우 등 어벤져스들의 전우애를 바탕으로 하여, 결정적인 순간 그간의 이견을 불식하고 합체한 어벤져스 팀. 그리고 그들의 헌신을 통해 돌아온 동지들, 혹은 복구의 감격과 함께 대장정의 엔딩을 화려하게 빛낸다.

결국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결론은 숱한 오류와 폐해에도 불구하고 인류애와 인류 역사, 그리고 인류 발전에 대한 ‘긍정적 헌사’이다. 신의 심판 대신, 인간의 손으로 자신들이 벌려놓은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겠다는 주체적 의지의 '반신론적' 표명이기도 하다. 물론 그 중심에, 미국 문명의 정점인 아이언맨과, 아메리카니즘의 대변자인 캡틴 아메리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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