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여당의 정치는, 한편으론 화가 나지만 또 한편으론 딱하다는 생각도 든다. 전임 정권을 무려 ‘대통령 탄핵’으로 붕괴시키고 들어선 정부임에도 세상을 바꾸는 일에는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정세는 정부 여당이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수세적일 수 밖에 없는 국면이다. 개혁 의제로 정국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식 부자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이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정권은 어찌됐든 세상을 바꿀 의지를 가진 인물을 중히 쓸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는 몇 가지 상징성을 갖춘 인물이라는 이유로 선택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방대 출신의 40대 여성으로서 서울 법대 출신의 60대 남성이 주류인 헌법재판소 내에서 균형을 잡아 줄 인사라는 것이다. 노동법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도 상당한 고려가 있었을 걸로 추측한다. 뭔가 개혁적인 의제 설정에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인물에 대한 인사청문회라면 당연히 좌우가 충돌하고 있는 민감한 사회적 가치에 대한 찬반 논란 등이 주된 쟁점이 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주식투자가 문제였다. 낙태죄, 대체복무제, 군 내 성소수자 처벌, 5.18 폄훼 등 민감한 대목에 대해서는 오히려 후보자 본인이 서면답변을 통해 애매한 입장을 밝혀 놨다는 점을 박지원 의원이 지적할 정도였다.

사실 이미선 후보자의 주식투자 대목은 문제를 지적하기가 쉽지 않다. 이미선 후보자 또는 그 배우자가 재판 과정에서 취득한 내부정보 등을 활용해 투자를 했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으면 법 위반 사실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만일 불법이 확인된다면 이미선 후보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로 물러나야 한다.

남는 것은 주식투자 액수가 과도하다는 점과 판사가 일과시간에 주식투자에 몰두했다는 불성실의 문제인데, 전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단지 재산이 많다는 점은 공직자로서의 결격사유가 될 수 없고 부동산 투기보다는 나은 거 아니냐는 반론 앞에서 무력화된다. 후자는 후보자 본인이 아닌 배우자의 문제이므로 이것 역시 치명적인 결격사유로 평가하기 어렵다. 청와대가 논란을 알면서도 이미선 후보자를 지명하고 밀어 붙일 수 있는 배경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따져보기 위해서는 이미선 후보자의 결격사유나 임명 또는 철회라는 구도에서 일단 벗어나야 한다. 이 정권이 이미선 후보자를 지명하는 것으로 보여주려는 정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을 이렇게 바꾸면 본질이 드러난다. 이미선 후보자의 지명과 검증 부실 논란에 대한 청와대의 태도는 이 정권이 추진하는 개혁의 한계를 정확히 드러낸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10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의원들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논란이 불거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통령이 이미선 후보자를 지명한 배경에는 물론 현실적 한계도 작용했을 것이다.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직전의 개각 국면에서도 청와대 관계자들은 언론을 통해 문제가 없을만한 사람은 다들 자리를 고사하고 하겠다는 사람들은 논란이 될 만한 문제를 다들 안고 있다는 취지로 하소연을 한 바 있다. 여당 모 의원도 라디오 인터뷰 등을 통해 지금 50대에 해당하는 세대가 재산증식 과정 등의 논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말들이 전적으로 핑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동시에 이 정권이 동원할 수 있는 인적자원의 범주가 기성의 엘리트 그룹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도 보여주는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엘리트들(물론 이들은 참여정부에서도 엘리트였다. 예를 들어 경제부총리들을 보라)이 문재인 정권에서 ‘적폐청산’의 칼을 들고 스스로를 수술하겠다고 나서는 형국인 셈이다.

만일 이 정권이 ‘촛불혁명’의 정신을 계승하는 ‘피플파워’ 정부라면 다소 간의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파격적 인사를 핵심포스트에 동원하는 것으로 이런 난국을 돌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전혀 그렇게 볼 수 없다. 물론 헌법재판관이라는 특히나 민감한 지위에 기성 엘리트 권력 내의 일정 이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를 앉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당연히 충실히 개혁의 로드맵을 따르는 정권이라도 모든 분야에 파격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현실론이 수용되려면 이미선 후보자 같은 사례가 ‘예외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과연 그런가?

오히려 ‘진보언론’ 기자 출신이라는 사람조차 청와대에 들어가서는 건물주가 되어 자기 살 길 부터 찾는 게 표준적 행동 양식이 돼있는 판국이다. 장관 후보자라는 사람들 다수가 개혁을 추진하기보다는 기성 관료의 해법을 반복하거나 자본의 이해에만 충실한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개혁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재정 투입이 필요하지만 IMF도 10조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한 추경 예산도 관료들의 저항 끝에 7조원 수준에서 타협돼가는 상태다. 내년에 총선을 치러야 하고 그렇다면 남은 1년은 오로지 안정적으로 정국을 관리해야 한다는 식의 정치는 정녕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인가?

황당하게도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를 청와대 스스로가 이미 만들어 놨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의 존재가 그것이다. 보수세력은 김연철 장관 임명 반대에 거의 모든 화력을 쏟아 부었다. 김연철 후보자의 특이한(?) 언행 탓에 국민 여론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연철 후보자는 스스로 장관이 될 줄 몰랐다고 했다. 실제로 조명균 전 통일부 장관처럼 엘리트 관료 출신이 아닌 사람이다. 이 모든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면서도 대통령이 장관 임명을 강행한 이유는 뭔가? 대북정책에 있어서 하고자 하는 바가 확실하고 그걸 흔들림 없이 추진할 준비가 돼있기 때문 아닌가?

대북정책의 성과는 불투명하다.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이 대화의 불씨를 살렸지만 북한과 미국은 양쪽 다 판을 깨지는 않으면서 장기전을 대비하는 태세이다. 일전에 밝혔듯 북미정상회담은 3차, 4차에 이를 수 있지만 미진한 합의 또는 ‘노딜’이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이 정권 내에 비핵화 문제에 있어서 지금보다 의미있는 진전이 이뤄지지 않을 확률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에서도 난제를 풀기 위해 이 정권이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점은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과연 경제나 교육, 또는 노동, 아니면 사회 일반을 아우르는 어떤 정책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런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낙태죄 폐지 입장에 가까운 헌법재판관을 임명해 진일보한 결정을 이끌어 내도록 한 것은 분명한 성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사례와 대북정책을 제외한 대목에 있어서 이 정부의 태도는 그저 법을 어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서면 답변으로는 최대한 보수 표심을 자극하지 않는 수준에서 청문회 통과를 제1순위로 놓자는 이미선 후보자의 처신과 거의 일치한다. 이 결말은 무엇인가? ‘현상유지’ 아닌가?

물론 섣부른 개혁 행보가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이 정권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여러 위기를 겪는 이유가 그래서라고 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피플파워’가 현실을 바꾸지 않는 것처럼 보이니까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이 틈을 자유한국당과 조선일보가 말도 안 되는 종북론과 내로남불 프레임으로 파고들고 있다. 지금이라도 반격의 발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신실하게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 개혁을 관철하려는 의지에서만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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