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섬, 사월의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이하 생략) - ‘바람의 집’, 이종형

제주도는 전 국민적인 관광지이다. 최근에는 올레길이 각광 받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찾고 있다. 그런데 제주의 마을 구비구비를 찾아드는 올레길의 마을들, 특히 북제주 쪽 마을들의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건 죽은 이들의 명패, 관광객들이 밟고 지나서는 그 땅은 70여 년 전 그 마을 사람들의 피로 물든 땅이었다.

특별기획 다큐드라마 EBS <다큐프라임> ‘바람의 집’ 2부작

2018년 10월 18일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평균 연령 90세인 18명 노인들이 제주지방법원에 들어섰다. 수용인 명부가 있을 뿐 이제는 기록조차, 아니 그 당시에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군사재판을 통해 국방 경비법 위반부터 내란죄까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렀던 이들의 재심 재판이 있던 날이었다. '죽기 전에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라는 절박한 호소에 대해 재판부는 '공소 기각'으로 답했다.

세월도 덮을 수 없는 이들의 억울함, 아니 억울함조차 호소하지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 과연 70여 년 전 제주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EBS <다큐프라임>은 생존자 5인의 증언과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토대로 제주 4.3 사건을 '재연'한다. 배우 고두심의 내레이션과 제주도의 방언을 그대로 살려낸 입말의 생생함을 더한 재연드라마 <바람의 집>을 통해 해방 공간 제주의 비극이 되살아난다.

들끓는 민심, 한라산 무장대와 서북청년단

이제 아흔이 넘은 부원휴 옹 등은 당시 중학생이었다. 한 마을에서 중학교를 보내는 집이 몇 안 되던 시절의 중학생, 중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올라가 출세를 하겠다는 꿈에 부풀던 시절이었다. 3월 1일 여느 때와 같이 학교로 향하던 부원휴는 당시 제주시의 중심이었던 관덕정을 지나며 '신탁통치반대', '미국과자반대' 등의 슬로건을 내건 가두시위 행렬을 목격한다. 시위대열을 지켜보는 것도 잠시, 오후 2시 45분 경찰의 발포로 거리는 아비규환으로 변한다.

특별기획 다큐드라마 EBS <다큐프라임> ‘바람의 집’ 2부작

기마경찰과 시위대열이 뒤엉키며 발생한 소요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아이를 업은 엄마, 어린 학생 등 6명이 희생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발포라 해명했지만 이는 외려 민심을 들끓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47년 3월 10일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해당하는 166개 기관 4만 명의 사람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런 제주도민의 궐기를 남로당의 선동으로 몰아 갔다.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서북청년단이 바다를 건너왔다. '공산주의 박살내고 통일조국 건설하라'는 과격한 반공주의를 내세운 단체, 북에서 부모와 재산을 잃고 혈혈단신 내려온 이들은 경찰, 경비대 작전에 가담하여 무자비한 '좌익 사냥'에 앞장섰다. 선거를 앞두고 단독 선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조속히 정리하고자 하는 정부와 미군정의 의도가 서북청년단의 횡포와 폭거를 조장했다.

이렇게 경찰의 가혹한 수색과 탄압이 계속되며 제주도의 좌익 세력은 위기를 느낀다. 이에 한라산에 은신해 있던 무장대는 4.3일 '전 국민이여 궐기하라', '단독선거 결사반대'를 주장하며 오름에 봉홧불을 올리고 화북면 경찰지서 등 12개 경찰서를 습격해 경찰과 우익 인사를 공격, 이 과정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명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전국에서 선거가 실시됐다. 전국 평균 투표율 95.5%, 하지만 제주도 전체 투표율은 62.8%. 그중에서도 북제주는 46.6%로 과반수에 미달, 제주도 세 개의 선거구 중 두 개가 무효화되었다. 전국의 선거구 중 유일하게 5.10 단독 선거를 '보이코트'한 지역이 되었다. 단독 선거를 반대한 후폭풍은 거셌다.

배반의 땅 제주, 가혹한 대가

특별기획 다큐드라마 EBS <다큐프라임> ‘바람의 집’ 2부작

제주도가 공산주의자에 의해 점거되어 조속한 진압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부와 미군정은 부산, 대구, 여수의 3개 대대 병력을 증파했다. 그리고 10월 17일 포고령이 내려졌다. 해안선으로부터 5KM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역의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지역 주민들의 소개령이 내려졌다.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잔혹한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었다. 11월 중순부터 해가 바뀐 다음 해 2월까지 중산간 마을은 불에 탔고 남아있던 주민들은 학살되었다. 해안에 피신한 주민들 중에도 무장대의 가족이란 이유로, 혹은 무장대를 도왔다는 이유로 즉결 처분 대상이 되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 갈 곳 없는 사람들, 밭고랑에 시체가 수북했고 피가 흥건했다. 이런 포악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주민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치려 했고, 그럴수록 애꿎은 희생자는 늘어만 갔다.

4개월 동안 중산간 지역의 마을 95%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1949년 6월까지 10,761명이 희생되었다. 이들 중 10% 이상이 노약자였다. 2만 5천에서 3만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희생되었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폭도'로 체포되었다.

특별기획 다큐드라마 EBS <다큐프라임> ‘바람의 집’ 2부작

그렇게 폭도로 체포된 이들에게는 가혹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장대에 쌀을 조금 준 것 밖에 없다는 호소에도 경찰과 서북청년단은 전깃줄로 묶어 감전시키고, 오물을 먹이며 무장대를 불으라 했다. 포승줄에 묶어 산지축항(제주항)을 통해 육지로 호송되던 이들은 정식 재판도 거치지 않고 증인이나 증거도 없이 내란죄 등의 죄를 물어 징역 1년에서 7년의 판결이 내려졌다. 바로 2019년에서야 '공소 기각'이 된 그 판결이다.

이제는 아흔이 넘거나 아흔 줄의 조병태, 박내은, 박동수, 부원휴 등 증인이 된 이들은 70년의 세월 동안 그 내란의 족쇄를 지고 살아왔다. 제주도에서 드문 중학생이 되어 뽐내던 소년, 서울로 올라가 출세하겠다던 포부를 지녔던 아이, 심지어 외삼촌이 선거위원이란 이유만으로 무장대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라며 집에서 식구들과 밥 먹다 자신의 눈앞에서 형과 형수가 살해되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동생. 이 평범했던 제주도민들이 무차별적인 초토화 작전 와중에 가족과 세월을 잃었다.

7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려진 사건번호 2017의 '공소 기각', 그러나 4.3 희생자들은 이제 명예회복의 첫 삽을 떠졌을 뿐이라며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서 제주 4.3사건에 대한 제대로 된 규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주장한다. <EBS 다큐 프라임- 바람의 집> 2부작은 민간인 희생자였던 증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공권력의 폭압과 희생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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