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시기에 동일한 소재의 작품이 쏟아지는 경우가 있다. 90년대 말 영화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이 그렇고, 이번에 소개하는 뮤지컬 ‘킹아더’와 올 여름 EMK가 선사할 ‘엑스칼리버’가 이런 사례에 속한다.

‘엑스칼리버’는 아더가 왕이 되기 ‘전’의 이야기를 1막에서 다룰 예정임에 비해 ‘킹아더’는 왕이 된 ‘후’의 서사에 집중한다. ‘킹아더’의 첫 번째 문제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대개의 영웅 서사는 주인공이 고난을 겪은 후 영웅으로 거듭난다.

뮤지컬 <킹아더> (사진제공=R&Dworks)

하지만 ‘킹아더’는 엑스칼리버를 뽑은 아더가 왕이 되면서부터 서사가 진행된다. 영웅이 빚어지는 과정 없이 뮤지컬이 시작된 지 10분에 바로 엑스칼리버를 뽑아대니, 관객이 아더에게 바라는 영웅의 정서가 휘발된다. ‘만들어지는’ 영웅이 아니라, ‘만들어진’ 영웅 서사에 관객이 얼마만큼 감정이입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든다.

두 번째 문제는 아더의 아내인 귀네비어와 호수의 기사 랜슬롯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부실하게 묘사되는 개연성 결핍이다. 비운의 오스트리아 왕비 ‘엘리자벳’처럼 남편에게 받는 사랑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귀네비어는 갑자기 랜슬롯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제작사가 2막을 원작보다 다듬었다고는 하지만 이런 개연성의 문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갔어야 했다.

세 번째는 아더의 ‘위민정신’의 실종이다. 아더는 “백성을 위해서라면”이라는 대사를 틈날 때마다 강조한다. 하지만 그가 영국 백성을 어디서, 어떻게 위하는가에 대해 뮤지컬의 서사 진행은 도통 관심이 없다. 아더가 영국 왕이라는 영웅성을 강화하기 위한 단순한 ‘레토릭’으로 들릴 지경이다.

뮤지컬 <킹아더> (사진제공=R&Dworks)

서사 진행에 있어 이런 다양한 약점을 갖는 ‘킹아더’지만 알고 보면 나름의 미덕도 있다. 영국 왕의 전설을 다룬 뮤지컬이지만 해당 뮤지컬을 제작한 나라가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라는 점에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역사를 살펴보면 영국과 이웃 나라인 프랑스의 관계는 우호적이기보다 적대하는 관계가 많았다. ‘100년 전쟁’만 해도 그렇다. 영국과 프랑스가 116년 동안이나 전쟁과 휴전을 반복하면서 한 세기가 넘도록 치열하게 싸웠다.

미국 독립전쟁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미국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가 물적 자원을 지원했다. 문제는 너무 많이 지원하다 보니 본국인 프랑스의 재정이 큰 어려움을 겪었단 점이다. 그만큼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는, 한국으로 치면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갈등만큼이나 갈등의 골이 깊었다.

뮤지컬 <킹아더> (사진제공=R&Dworks)

하지만 프랑스는 이런 두 나라의 역사적 갈등의 골을 초월하고 자국의 역사가 아닌 영국의 전설을 토대로 뮤지컬로 만들었다. 이 상황을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에 대입하면 일본이 우리나라의 주몽 혹은 대조영과 같은 역사적 인물을 일본에서 뮤지컬로 만든 것과 흡사하다.

역사적인 갈등을 초월해 영국의 전설을 뮤지컬이라는 문화 산물로 만든 결과가 프랑스 뮤지컬 ‘킹아더’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문화적 포용이 ‘킹아더’ 안에 녹아있다는 점은 뮤지컬 ‘킹아더’의 감상 포인트로 작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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