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종영한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볼수록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운명관인 '아모르파티'가 떠오른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김연자의 노래 제목이기도 한 아모르파티는 인간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삶을 예찬한다.

<눈이 부시게> 김혜자(김혜자 분)의 운명관은 정확히 니체의 아모르파티와 맞닿아 있다. 혜자가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긍정했던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남편 이준하(남주혁 분)을 잃고, 아들(안내상 분)마저 교통사고로 다리 한 쪽을 잃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혜자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혜자는 자신의 삶을 두고 불행하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혜자가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70대 할머니 김혜자가 아닌 25세 대학생 김혜자(한지민 분)라는 환상을 갖기 시작하면서 혜자의 삶은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25세 대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환상 속에서 젊은 혜자는 과거 준하와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꿈꾸고, 아들과 며느리(이정은 분)의 딸 혜자로서 아들 부부의 갈등을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인다.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

이 모든 것은 기억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혜자의 환상이고 꿈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면 우리 인생 자체가 꿈이고 환상이다. 젊은 시절 고통스럽던 일도 혜자 정도의 나이가 되면 아득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어쩌면 혜자는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 잊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만 기억하기 위해 알츠하이머라는 시간 여행을 하게 된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혜자는 자신의 행복했고, 불행했고, 억울했던 인생을 모두 인정하기로 한다. 그녀가 시간을 되돌려 다시 찾고 싶었던 남편 준하와의 행복했던 기억부터 불행했던 기억까지, 그 모든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혜자는 준하와의 기억마저 잊을까봐 두렵다.

다행히도 <눈이 부시게> 마지막 회(12회) 엔딩 장면에서 혜자는 준하만큼은 잊지 않고,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으로 끝나며 뭉클한 감동을 선사했다. 설령 그것이 꿈이고 환상이라고 할지라도, 점점 기억과 의식을 잃어가는 혜자가 준하와의 달콤한 상상으로 조금이나마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아름답지 않을까.

혜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다고.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다고. 정의로운 기자였던 남편을 독재정권의 잔인한 고문으로 떠나보내고, 하나뿐인 자식마저 다리를 잃는 등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온 혜자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누구보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살아온 혜자의 인생은 박수 받아 마땅하다.

JTBC 월화드라마 <눈이 부시게>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되 운명에 체념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상실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이다. 여기에 행복했던 기억, 불행했던 기억 모두 받아들이기로 한 혜자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고백한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아직 자신의 인생을 긍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속삭인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충분하다고 말이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걱정하며 살아간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바로 지금 여기의 오늘을 열심히 살아갈 뿐. 눈이 부시게 말이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그럼에도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 인생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선사한 제작진과 스태프들, 매회 깊은 울림을 안겨준 김혜자를 비롯한 배우들의 열연에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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