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진실을 밝히는 데 더 빠른 걸음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해 보셨냐.”

MBC ‘뉴스데스크'에서 왕종명 앵커가 고 장자연 씨 사건의 증인으로 나선 배우 윤지오 씨에게 이른바 ‘장자연 리스트’ 속 인물의 실명을 공개해 달라며 한 말이다. 윤 씨는 왕 앵커의 이러한 요청에 “발설하면 책임져 줄 수 있냐"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 경찰이 밝혀내야 하는 부분이고, 공표해야 하는 부분이 맞다. 나는 일반 시민으로서, 증언자로서 내가 말씀드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며 거절했다.

왕 앵커의 질문이 무책임하고 무례했다는 논란을 차치하고 생각해 보면, 그 말대로 생방송 때 리스트 이름을 말하는 것이 명확하고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면에서 ‘빠른 걸음'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실을 밝히는 데 빠른 걸음이란 대체 무엇일까? 진실이란 대체 무엇일까?

故 장자연 씨의 증인 배우 윤지오 씨에게 질문하는 왕종명 앵커(사진=MBC갈무리)

진실은 결코 빠른 걸음으로 닿지 않는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다각도로 자세히 들여다봐야 진실은 그 얼굴을 조금 보여줄까 말까 한다. 왕 앵커의 말대로라면 장자연 씨가 죽음으로 남긴 성접대 리스트는 ‘빠른 걸음'을 걸어야 했지만, 아주 빠르게 침묵당해야 했다. 그리고 10년 뒤인 지금에야 장자연 씨의 증인이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서지현 검사나, 안희정 전 지사의 비서였던 김지은 씨의 미투 폭로 역시 그렇게 내딛은 증언 이후 ‘2차 가해'라는 극심한 험로를 견뎌야만 했다.

왕 앵커의 ‘빠른 걸음'은 결국 ‘사건의 스펙터클화'를 뜻한다. 몇 마디의 극적인 대사, 자극적인 반응들로 만들어진 몇 분의 장면들이다. 치밀한 공적 맥락이 소거된 특종과 단독들이다.

이렇게 스펙터클화된 폭로는 ‘가장 늦은’ 걸음이다. 피해자들이 법적, 사회적 구제를 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토해내는 비명에 가깝다. 2016년 트위터 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폭로 운동만 해도 법적으로 문단 내 위력을 입증할 수 없어 피해자들이 자신의 삶까지 걸고 감행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실질적 처벌과 보상이 이뤄진 것은 미성년자까지 폭력을 가한 시인이 유일했다. 다른 고발인들은 수많은 2차가해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피해자들끼리 차이를 봉합하지 못해 반목한다거나, 명예훼손에 시달리거나, 가족과 커리어에 대한 위협을 감당해야 했다.

성폭력 규명에 대한 빠른 걸음은 오히려 ‘왕 앵커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에 가깝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제작한 반성폭력 캠페인 영상에서 유재석, 표창원 등 ‘침묵하지 않겠다'고 밝힌 남성 인사들이 침묵하지 않는 것이다. ‘정준영이 죄라면 모든 남성들이 죄인이냐'라고 말하는 남성들이 가담해 온 강간문화를 고백하는 일이다. ‘내가 그랬다’며 자수하는 일이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그동안 걸을 대로 걸었다. ‘당신의 안전을 보장하겠다. 당신이 처한 어려움에는 이런 것들이 있으니, 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 주겠다’라고 말해도 모자란 상황인 것이다. 이런 말들을 언제까지 일러줘야 하는가?

진실을 감당할 사회를 만드는 것이 먼저다. 버닝썬 강간약물 카르텔 사건, 김학의 전 검사 성접대 사건, 그리고 웹하드 불법촬영 카르텔 모두 그렇다. 본질은 남성 사회가 여성을 이른바 ‘환금작물'로 여기는 가부장제 사회의 오래된 ‘여성 거래' 카르텔이다. 성 거래는 단지 이슈 대결, 주목 대결이 아니다. 진실이 더 많이 트일 언로를 위한 제도, 문화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정준영 동영상', ‘김학의 별장 동영상 원본’ 등이 빠르게 공유되는 일을 막는 일이다.

‘여성 거래’에 대한 진실은 인류 역사상 최근에서야 겨우 그 진실의 일부가 드러나고 있다. 강간을 섹스로, 폭력욕을 성욕으로, 인간을 단지 여성으로만 보고 있었다는 진실이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강간약물, 성접대, 강간, 불법촬영이 판치는 이 한국 사회가 실은 여성에 대한 거대한 포주였다는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런데도 여성에게 ‘창녀’라는 말로 낙인을 덧씌웠던 일들을 규명할 자세가 되어 있는가?

기득권이 자신의 위치를 인정하는 것은 ‘죽음 수용 5단계’와 같다는 말이 있다. 기득권으로서 공기처럼 누려 온 특권을 인식하고 차별에 가담했던 진실을 인정하는 데 ‘부정->분노->우울->체념->수용’의 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진실을 밝히는 데 가장 빠른 걸음은 진실을 수용하는 역량이 마련된 사회다. 우리 사회는 이 첫 단계를 이제 막 밟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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