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아시안게임 축구대표팀의 금메달 도전이 너무나 아쉽게 끝났습니다. 23일 밤, 중국 광저우 톈허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축구 준결승전 UAE(아랍에미리트)와의 경기에서 전후반 연장 120분 동안 내내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골망을 열지 못하고 결국 종료 직전 상대 공격수 알 라브리에게 결승골을 내주며 0-1로 패했습니다. 모든 징크스란 징크스는 다 떨쳐내지 못하며 맛본 쓰라린 패배였고, 선수들은 골을 내주자마자 경기가 끝나고는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홍명보 감독이 승부차기를 염두에 두고 투입한 골키퍼 이범영(부산 아이파크)의 아픔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정말로 투입한 지 1분 정도 지난 상황에서 곧바로 실점을 허용하고는 팀 패배로 이어지며 모든 꿈이 한꺼번에 날아갔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이범영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했습니다.

▲ 아랍에미리트와의 4강 연장 후반, 승부차기를 대비해 골키퍼가 김승규에서 이범영으로 교체되고 있다 ⓒ연합뉴스
골키퍼 투입 전략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고 있지만 어쨌든 그 그라운드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한 이범영의 표정을 보고 필자 개인적으로는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로 이 경기를 통해 홍명보 감독 앞에서 만회하고 싶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1년 2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09 U-20(20세 이하) 월드컵 대표로 나선 이범영은 조별 예선 1차전 카메룬과의 경기에 선발 출장해 의욕적인 모습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가 초반 터져 나왔습니다. 카메룬의 안드레 아코노 에파의 예상치 못한 중거리 슈팅을 어정쩡하게 잡으려다 놓쳐 어이없는 실점을 하고 만 것입니다.

안정적으로 펀칭하면 별 문제가 없었을 상황이었지만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돼 이어진 실점 장면은 이범영의 운명을 바꾸고 말았습니다. 홍명보 감독이 당시 상황에 대해 "범영이가 실점하는 것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라면서 아쉬움을 나타냈고, 이 실수로 이범영은 이후 경기 주전을 김승규(울산 현대)에게 내주고 만 것입니다. 당시 19년 만에 8강에 진출하며 그야말로 쾌거를 이뤘지만 이범영 입장에서는 정말 아쉬움이 남는 대회로 기억되었습니다.

이 당시 충격은 생각보다 오래 갔습니다. 이후 경기에도 잇단 실수를 범하며 주전 경쟁에서 밀린 이범영은 위축된 플레이로 긴 슬럼프에 빠지는 듯 했고, 가혹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어렸을 때 큰 대회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은 이범영을 더욱 거듭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언젠가는 꼭 만회하겠다며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회는 찾아왔습니다. 소속팀에서의 꾸준한 활약, 쾌조의 컨디션을 바탕으로 이범영은 다시 떠올랐고, 홍명보 감독은 아시안게임 대표에 이범영과 다시 함께 하면서 기회를 줬습니다. 1년 전 실패는 적어도 소속팀에서만큼은 온데간데없었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통해 만회할 일만 남은 듯 했습니다. 그리고는 4강전 아랍에미리트전에 연장 후반 종료 직전 홍명보 감독의 부름을 받고 투입되며 자신의 강점을 발휘하고 24년 만의 결승 진출에 견인차 역할을 하려는 의지를 다졌습니다.

홍명보 감독이 이범영을 투입한 것은 그의 뛰어난 패널티킥 선방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범영은 고교 시절부터 패널티킥에서 만큼은 이운재 만큼이나 상당한 선방률을 보였던 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본인 스스로 50여 차례 승부차기 대결을 벌여 2-3번밖에 안 졌다고 자랑할 만큼 패널티킥, 승부차기 선방은 김승규보다 자신 있었고, 이 능력을 잘 알고 있던 홍명보 감독은 결국 승부차기를 앞두고 이범영을 투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것도 최대한 전력을 쓰지 않을 연장 후반 종료 직전에 말입니다. 이범영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지난해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슈팅을 막지 못하고 이범영은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기습적으로 공격해 들어오던 아랍에미리트 선수들을 놓치고 슈팅까지 연결한 것에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며 결국 선제 결승골을 내주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자연스럽게 큰 일을 내고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이범영 입장에서는 또 한 번 좌절을 맛봤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범영은 김승규와 더불어 차세대 국가대표를 이끌 골키퍼 재목으로 늘 거론돼 왔습니다. 홍명보호에서 다소 주전에 밀려있는 상황이었지만 큰 키(199cm)를 활용한 공중볼 키핑, 최근에 많이 좋아진 차분함을 바탕으로 한 안정성 등 경쟁력을 보여주며 꾸준하게 성장하는 선수로서 크게 주목받았습니다. 그러나 U-20 월드컵에 이어 아시안게임에서마저 큰 실수로 눈물을 흘리며 어찌 보면 선수 개인적으로 '국제 대회 징크스'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마저 낳고 있습니다. 충분히 좋은 실력을 갖췄음에도 이런 실수가 선수 개인에게 큰 상처가 돼서 발전에도 크게 저해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을 위해서, 그리고 대한민국 국가대표 골키퍼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범영은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수차례의 실패를 딛고 크게 거듭나는 위대한 선수들이 많았듯이 이범영도 아직 만회할 기회는 많고, 충분히 큰 선수로 거듭날 잠재력이 많은 선수임이 분명합니다. 이번의 실패가 입에 많이 쓰겠지만 더욱 독기를 품고 노력하는 선수의 면모를 보여주며 훗날 최고의 골키퍼로 우뚝 서는 그날을 기대하고 다시 일어서서 뛰어야 할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대회를 앞두고 "경쟁에 자신이 없으면 프로가 아니다"라는 강한 의지를 다졌던 것을 되새기고 다시 떠오르는 골키퍼 이범영의 모습을 앞으로 기대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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