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조건 개선과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날이다. 흑인들이 백인과 함께 버스를 동등하게 타는 것부터 시작하여 인권을 향해 지난한 과정을 걸어왔듯이, 여성 역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접받기 위해 111년의 역사가 필요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유엔은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로 정했다.

<MBC 스페셜>에선 111주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우리나라 여성주의 미술의 대가인 윤석남을 이 시대 여성의 워너비인 모델 한혜진이 찾았다.

1939년 만주 봉천 출생, 팔순이 넘었다. 팔순이 넘은 어르신하면 떠오르는 모습들, 하지만 그 상투적인 예상은 한혜진을 맞는 윤석남 화가의 모습에서 대번에 깨어진다. 희끗희끗하지만 자유분방하게 휘날리는 퍼머넌트 커트, 검버섯은 피었지만 팔순이 넘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의 생기 넘치는 표정, 우리가 연상하는 '노인 패션'과는 다른 조거팬츠에 패딩조끼 등등 활력 넘치는 화가의 작업복, 그리고 툭툭 마디가 불거져 나왔지만 웬만한 목수의 것이라 해도 믿을 만한 두툼하고 단단한 그녀의 손. 한혜진을 맞이한 건, 당신은 ‘총기가 허락되는 한’이라 하지만 여전히 진행 중인 작업의 세계 속에 흠뻑 빠져있는 한 예술가의 모습이다.

핑크를 찢다!

MBC 스페셜 '핑크를 찢다 화가 윤석남' 편

3남 3녀의 셋째,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싶어서 석남이라 지어준 이름. 하지만 그 아버지는 가장의 자리를 다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 나이 서른아홉, 막내가 겨우 두 살이었다. 집안을 어렵게 이끌어간 어머니를 보며 석남은 학교도 마다하고 가정 일을 돌보려 했다. 하지만 학교는 마쳐야 한다고 고집하셨던 어머니.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하던 그녀는, 또래의 여성들처럼 결혼을 하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를 키웠다. 그렇게 마흔이 되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 그림. 꽃과 풍경 대신 그녀는 어머니와 자기 주변의 여성들을 그렸다. 그저 그게 눈에 들어왔다던 윤석남. 그렇게 그린 그림이 아이 키우랴, 돈 벌랴, 살림하랴 경황이 없었던 자신의 어머니를 모티브로 한 '손이 열 개라도'였다. 그렇게 윤석남의 여성주의 화풍은 시작되었다.

그녀의 대표작에 ‘핑크룸 V’가 있다. 화가가 되기 전 그녀인 듯한, 화려한 자개로 장식된 여성이 앉아있는 소파. 하지만 그 형광빛 화려한 핑크색 소파 한편에는 가시가 삐죽삐죽 솟아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앉는 소파지만 그 소파는 그녀에게 가시방석이 되었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삶이지만 이게 과연 나의 삶인가 고민하던 그녀는 그 화려한 소파를 박차고 나왔다. 그렇게 윤석남은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는다. 윤석남의 여성주의는 곧 그녀의 삶이었다.

남편의 월급봉투를 통째로 들고 화방에 가서 화구를 샀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제부터 그림을 그릴 건데 그게 싫으면 이혼을 하라 선언했다. 그때부터 하루에 12시간 씩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를 넘어선 화가의 길을 걸었다. 3년 만의 개인전, 추상화풍이 지배하던 당시 화단에서 '여성'을 그린 그녀의 화풍은 주목 받았다. 그림을 그리던 것을 넘어 그녀는 나무를 활용하여 설치미술 작업을 시작했고,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 등 해외 미술계에서도 주목 받았다. 유화로 시작하여 나무, 드로잉, 설치미술까지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얼개만 남기고 종횡무진 다양한 시도를 했던 화가 윤석남. 그녀는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이중섭 미술상과 국무총리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여성주의 화가로서

MBC 스페셜 '핑크를 찢다 화가 윤석남' 편

하지만 그저 주변의 여성, 어머니, 그리고 자기 자신에 천착해 있지 않았다. 이매창, 허난설헌, 김만덕 등 재능은 있었지만 뜻을 펼치지 못한 우리 역사 속 여성들이 그녀 그림 속에서 살아난다. 페니미즘 작가,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 '명예'에 대해 고심한 결과물이다.

또한 사회적 여성에 대한 이야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가 우리 사회에 화두로 드러나기 이전에 관심을 기울여 나눔의 집이 만들어질 당시 자신의 설치 작품을 기부하기도 했다. 또한 여성을 넘어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작업, 유기견 1025마리를 나무에 아로새기느라 허리 수술까지 감내해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는 고민한다. 혹시 자신이 세상의 이목을 끌기 위해 작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만족에 빠진 미친 사람들'이라며 자신과 같은 예술가를 허심탄회하게 정의내린 윤석남 화가.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마무리 짓는다. '어쨌든 난 최선을 다했다'고.

MBC 스페셜 '핑크를 찢다 화가 윤석남' 편

이제 팔순을 넘어선 작가는 다시 40년 동안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우리의 채색화를 그리느라 자신의 자화상으로 연습만 1000장을 넘게 하고 있는 중이다. 회사원처럼 매일 일정한 시각 출근해서 하루 종일 작업에 몰두하는 일상. 주변에서는 예술적 감흥이 더 큰 설치 작품을 하는 게 작가의 명성에 더 도움이 되지 않느냐며 새로운 시도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지만, 그녀는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생애에 기억이 남는 관계들을 남기고 싶다. 우리의 전통 그림 중 여성의 초상화가 없다는 인식으로 인한 사명감도 있다.

그렇게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의 삶을 예술로 알려, 그 자신이 여성의 대표가 된 윤석남의 이야기는 또 다른 여성 그리고 여성의 딸인 한혜진을 통해 친근하게 전달된다. 또한 그렇게 윤석남이란 화가를 소개하는 걸 넘어, 화가의 작품을 들고 찾아가는 전시회를 마련하여 세상과 소통을 도모한다.

그녀가 그린 어머니의 이야기들은 전북 남원 구룡마을을 찾아들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미술 관람, 하지만 할머니들은 곧 '내 모습 같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포항 공대 미술관을 '개판'으로 만든 1025마리의 '사람과 사람 없이' 작품들은 고상한 대상이 아니라 익숙한 대상이기에, 그들의 눈빛을 통해 곧 사람들로 하여금 버려진 생명에 대한 관심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나무에 새겨진 서로 다른 표정의 여성들, '빛의 파종'은 청주 여성을 찾아 이제 곧 사회에 나서야 하지만 도전보다는 제약과 한계에 고민이 많은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의 공감을 얻는다.

111주년을 맞이한 세계 여성의 날, <MBC 스페셜>은 선언이나 캐치프레이즈, 담론이 아니라 ‘삶’에서 시작된 여성주의를 우리 시대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 윤석남 화가를 통해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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