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3.1절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열사에 대한 추모가 이어졌다. 정부는 유관순 열사의 독립유공자 서훈 등급을 기존 3등급이었던 독립장에서 최고등급인 대한민국장으로 추서했고, 유관순 열사를 그린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도 개봉됐다. 기쁜 일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유관순 열사를 재현하는 방식은 구태에 머무르고 있다. 여성 운동가에게는 ‘평범한 열일곱 소녀’라고 표현되는 ‘소녀다움’이 강요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소녀다움은 대부분 ‘밥(가사노동), 꽃(성적 대상화), 양(희생양)’의 도식에 갇혀 있다.

우선 ‘밥’으로 대표되는 가사노동자로서의 운동가를 보자. “만세 1주년인데 빨래나 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영화 <항거>의 명대사 중 하나다. 유관순 열사의 투사다움을 돋보이는 대사로 많이 언급되고 있다. 언뜻 보면 ‘소녀다움’에서 벗어난 모습이다. 하지만 이는 ‘해일이 몰려오는 데 조개나 줍고 있을 수 없다’라는, 가사노동을 사적이고 사소한 일로 치부하는 오래된 관념의 일부다. 만세 1주년에도 ‘빨래’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여성학자 정희진 씨가 마르크스주의자나 파시스트나 집에서 설거지 안 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듯, 기존 운동들이 한계를 드러낸 것은 이러한 ‘가사노동’에 대한 구별짓기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명대사는 “나 나가면 할 거 진짜 많은데.. 먼저 오라버니 밥상 한번 차려주고 싶네...”라는 것이다. 같은 영화에서 여성으로서의 유관순이 같은 가사노동에 대해 종류별로 다른 태도를 취하도록 한 것은 ‘운동’에서 ‘젠더’가 얼마나 문제적인지 보여준다.

그 다음 ‘꽃’으로 대표되는 성적 대상으로서의 운동가의 모습이다. 유관순 열사를 수식하는 대표적인 표현들은 ‘18살 꽃다운 나이 일제에 붙잡힌 유관순 열사’, ‘구국의 꽃’, ‘옥중에서도 피어난 대한 독립 만세’다. 이렇게 ‘꽃으로서의 여성’을 강조하는 것은 입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운동가를 그리지 못한다. 대표적인 문제가 유관순 열사에 대한 성적 대상화다. 유관순 열사를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에 ‘외모’가 뜬다. 널리 알려진 유관순 열사의 얼굴이 고문을 받은 탓에 실제 얼굴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역사적 인물에 대한 고증은 중요하며, 별개로 위인에 대한 미화는 전반적인 현상이다. 문제는 여성 운동가에 대해서는 성적 대상화까지 동반된다는 점이다.

(사진=중앙일보 갈무리)

이번 영화 <항거>에 대해 언론에서 ‘얼굴 퉁퉁 붓도록 고문 받아도 ‘대한 독립’ 외쳤던 유관순 열사 그린 영화 ‘항거’ 첫 예고편(인사이트)’라고 홍보하거나, 심지어 ‘유관순 열사 붓기빠진 실제 모습보니, 쇄골이…(중앙일보)’라는 헤드라인을 달았던 것이 대표적이다.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 ‘유관순’ 항목에서도 ‘무엇보다 저 사진은 미인형이 아니다 뿐이지 옥살이하는 사람치고는 준수한 편’이라는 서술이 있다. 서울 6호선 녹사평역의 독립운동가 벽화에서도 당시 의복 차림인 다른 운동가들과 달리 유관순 열사만 현대 여학생 교복 차림이어서 문제된 것도 유사한 맥락이다.

특히 여성 운동가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섹슈얼리티’가 문제적이다. ‘순결’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 하에 써내려 간 작품 <안네의 일기> 중 성적 농담이 서술된 대목이 오랜 기간 동안 은폐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유관순에 대한 일베의 성희롱 게시물은 이 ‘순결 서사’와 종이 한 장 차이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가들을 두고 ‘처녀’가 아니라면 진정한 피해자가 아니라는 주장이 나왔던 것, 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소설 <언더 더 씨>에서 희생자 여학생에 대한 성적대상화 묘사가 이뤄진 것 모두 순결 서사의 폐해다.

마지막으로 ‘양’으로 대표되는 희생자로서의 운동가의 모습이다. ‘유관순 누나의 무덤은 왜 찾을 수 없을까?(중앙일보)’처럼, 여성 운동가에 대해 ‘누나, 어머니, 할머니’라는 가부장 서사로 흡수시키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운동가 개인의 내밀한 욕망이나 사상보다 희생의 스펙터클만 강조되거나 납작한 신파로 흐르기 쉽기 때문이다. 한 누리꾼이 “남자 독립운동가는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고, 뭘 배웠고, 왜 독립에 대한 생각을 품게 되었는가, 독립운동의 과정은 어떠했는가에 초점을 맞춰 조명하는데, 여자 독립운동가는 운동한 이후 감옥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나에 초점을 맞추는 것 이 차이 너무하지 않나”라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2018년 4월 6일 서울 용화여고 재학생들이 교사의 성폭력을 폭로하는 스쿨미투의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 창문에 붙인 포스트잇 문구 (SNS 캡처)

부디 다음 3.1절에서는 다른 방식의 재현이 이뤄져 질적으로도 ‘추서’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생각해 볼만한 지점 하나. 유관순이 100년 후 현대에 다시 태어났다면, 어디에서 ‘독립’을 외치고 있을까? 2018년 시작된 스쿨미투의 현장에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주동자 색출 및 ‘피해자다움’을 강요받는 등 2차 가해에 시달리고 있지 않을까. ‘현대의 유관순들’에 대해서도 응원과 지지가 이뤄지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