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이른바 ‘20대 보수화 문제’를 다루는 정치권의 논의를 보면 한숨이 나온다.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걸 이용해보자는 식의 접근이 아니면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식의 미봉적 대응으로 피해를 최소화 해보자는 시도만 보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최고위원인 설훈 의원의 발언은 흥미롭다. 설훈 의원은 20대 남성이 현 정권을 기대만큼 지지하지 않는 현상의 원인을 ‘교육’의 문제에서 찾았다. 자신은 유신 이전에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는 회고를 말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20대 남성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 등에서 “우리를 교육을 못 받은 사람들로 규정해 무시한 것”이란 반발을 초래했다. 보수언론은 같은 당의 홍익표 의원이 얼마 전 국회 토론회에서 반공교육의 문제에 대해 발언한 것을 이 맥락에 끼워 넣었다. 정부 여당이 20대를 ‘비하’하고 ‘무시’한다는 담론적 맥락이 형성된 것이다.

과연 이게 그런 문제일까? 이쯤에서 따져봐야 한다. 사람의 인식은 그가 처해있는 환경이나 살아오면서 한 경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특정 세대의 세계관에 대해 말하기 위해 ’교육’의 문제를 먼저 떠올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교육을 말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장이 과연 사실에 부합하는 것인지, 얼마나 적절한 근거를 갖추고 있는지에 있다.

더불어민주당 설훈 최고위원 후보가 25일 오후 서울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정견발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의 주장에 등장하는 ‘교육’은 ‘학교 교육’을 말하는 것이다. 보수정권에서의 교육정책이 특권화되고 시장화됐다는 평가는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민주주의와 관련한 교육의 부실이 이뤄진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반공교육이 강화됐다는 주장 역시 여기에 맞는 일부 사례가 존재할 수는 있지만 전체 교육과정이 경향적으로 그렇게 변화된 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더군다나 반공교육과 20대 보수화를 연결하는 논리도 부실해보인다.

환경이나 경험이 특정 세대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은 ‘학교 교육’에 한정하는 게 아니라 사회 전반의 변화를 고려해서 논해야 한다. 젊은 세대의 보수화는 민주주의나 반공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원리와 무한경쟁을 절대시 하는 세태와 맞닿아 있다고 봐야 한다. 박정희 체제 이후 우리 사회는 지속적으로 이런 인식을 재생산해왔다. 공동체는 거대한 시장이 됐고 사람은 상품에 불과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 공동체는 개인에 ‘잘 팔리는 상품’이 될 것을 강요했고 이 과정에서 낙오한 사람은 ‘시장에서 도태된 상품’으로 낙인찍었다.

그나마 ‘수요’가 충분한 호경기에는 이런 인식의 부작용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을 수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된 건 경기가 하강하고 저성장을 걱정할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돌이킬 수 없는 낙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공동체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시장원리와 완전경쟁을 통한 각자도생의 논리를 내면화 했기 때문에 공동체의 ‘적극적 역할’이라는 것 역시 이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데 좀 더 분명한 시장원리, 좀 더 공정한 경쟁, 좀 더 ’나’에게 유리한 각자도생의 룰이라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이제 시장에서의 ‘실전’에 막 진입하기 시작한 젊은 세대가 이런 목소리를 키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즉 20대의 보수화는 근본적 의미에서 ‘사회’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믿음을 체제가 재생산해온 것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어느 특정 정파의 문제라고 말하기 어렵다. 과거 민주정부 10년의 ‘개혁’도 이런 믿음의 극복을 제대로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란 슬로건이 “기회가 평등하면 과정도 공정하고 결과도 정의로울 것”이란 믿음으로 환호를 받은 것 또한 비슷한 이유이다. 보수정부와 민주정부는 서로 다른 사회적 철학에서 경쟁을 한다기보다는 공장한 경쟁을 보장하는 시장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누가 더 잘 관철할 수 있느냐를 두고 경쟁해 온 면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설훈 의원이나 홍익표 의원의 발언은 이 상태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여당의 처지를 보여준다. 이들의 발언은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직시한 것이라기보다는 20대 남성 지지율 하락이라는 ‘현안’에 뭔가 대응해야 한다는 정무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20대의 보수화는 보수야당 지지 기반 강화로 이어질 것인데, 이 정권이 보수세력과 비교해 차별적 우위를 갖는 지점은 역사적 정당성이므로 반민주세력의 수사를 동원하며 반공주의를 지적하자는 것이다. 이런 대응은 물론 ‘스핀닥터’의 관점에서 봐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지만 무엇보다도 정치가 문제의 원인에 무관심하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보수야당 역시 정확히 반대편에서 내로남불, 위선, 무능, 탓, 척 등의 수사를 동원하며 똑같은 시도를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은 일제히 나서서 이 정부가 20대를 무시하고 있으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정책을 통해 386 등 기성세대의 이익만을 중시하고 이를 위해 20대의 기회는 박탈하고 있다는 이념적 맥락을 형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지난해의 가상화폐 논란은 이런 식으로 포장된 대표적 문제의 하나이다. 기성세대는 주식과 부동산으로 부를 축적했으면서 젊은 세대가 익숙하고 유리한 가상화폐 투자는 정부가 나서서 가로막는 방식으로 기회를 박탈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결정을 주도한 청와대의 ‘강남 부자’들이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었다거나 심지어 가상화폐 시장에서도 미공개정보 입수를 통한 부당거래를 했다는 주장이 지금까지도 무책임한 형태로 제기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 식의 1차원적인 공방이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 바람직한 사회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며 이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스스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가능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최근의 사회적 대화 논란처럼 ‘답정너’와 ‘들러리’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최근 이와 관련한 논의가 진행되고 좋은 제안이 나오기도 했지만 잘될 것 같진 않다. ‘좋은 모양’을 갖추는 것을 넘어 상호 간의 설득과 이해가 실제 통치에 반영되는 실효적 구조를 만들기 위한 장기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기성 정치권은 지금까지 청년이니 뭐니 하는 딱지를 붙여 젊은 사람을 비례대표 의원 후보로 영입을 하거나 지도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량을 베풀어 왔다. 운 좋게 국회에 입성한 청년 정치인은 그저 소모되다가 사실상의 조기은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기 일쑤였다. 요즘에는 그나마 하버드 출신의 최고위원이 이러한 청년 정치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데, 사실 이 사례는 그나마 ‘청년’에게 할당된 자원마저 학벌 엘리트가 차지한 것이란 점에서 어떤 모범사례로 꼽기는 어려울 것 같다. 최근 이런 사람들이 공론장에서 소외된 20대 남성을 대변한다고 하니 좀 이상한 기분도 든다. 이런 세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걸음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