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정보를 차단하는 정부의 새로운 기법을 ‘검열’이라고 볼 수 있을까? 어디까지를 검열이라고 할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국가권력이 개인의 인터넷 이용에 대한 개입을 강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정부의 새로운 방식은 보안 프로토콜의 헛점을 이용한 것이고 추가 기술 적용에 따라 무력화될 게 거의 확실하다.

이제 관점을 달리 해보자. 지난 16일 정부의 새로운 유해정보 차단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온 남성들의 의도는 무엇일까? 언론 보도를 보면 이들은 현장에서 유독 자신들의 ‘진정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음란물을 보지 못하게 됐다는 이유가 아니라 정부의 새로운 정책이 북한이나 중국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통용될 일이기 때문에 이를 막으려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런 어법은 ‘메시지’보다 ‘메신저’의 진정성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세계관의 반영이다. ‘메시지’는 근본적으로 믿을 수가 없다는 냉소주의다. 이런 세계관 속에서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갖추려면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첫 번째는 ‘메시지’를 내놓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미 모자람이 없이 살고 있으면서 굳이 공적인 의미가 실린 행위를 하려는 것으로 칭송받는 이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메시지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신이 걸 수 있는 가장 큰 걸 거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종종 이것은 ‘죽음’으로 귀결 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점이 인터넷 공간의 반발 목소리에 비해 다소 적은 숫자인 100여명만이 집회에 나오게 된 것에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음란물 때문이 아니라는 이들의 항변과 달리 인터넷 상의 반발이 ‘음란물 차단’에 맞춰져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성인이 성인물 보는 게 죄냐”는 항변이 있는 걸 보면 그렇다. 정부의 SNI 필드 식별을 통한 유해사이트 차단은 특별한 예고를 통해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새로운 차단에 실질적 위협(?)을 느껴 문제제기를 시작한 사람들은 유해사이트의 이용자들일 수밖에 없다. 유해사이트의 범주에는 물론 음란사이트 뿐만이 아니라 불법도박이나 저작권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소지와 관련한 사이트 등도 포함돼있으나 인터넷 각 공간에서 강력한 문제제기를 내놓은 ‘이용자’들이 어떤 사이트를 주로 이용했을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반대자들이 반대를 하는 이유에 따라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달리 평가할 일은 아니다. 반발하는 사람들의 이유와 관계없이 정부 정책의 정당성은 그 자체로 따지면 될 일이다. 이미 개인의 인터넷 이용에 대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오픈넷 등의 시민단체들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럼에도 정부의 새로운 정책에 대한 반발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필요하다. 여론이 어떤 경로를 따라 형성된 것인지를 알아야 우리 사회가 어디에 서있는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고, 이를 통해서만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16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https 차단정책 반대시위'에서 참가자들이 피켓과 촛불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제 음란물에 대해 말해보자. 정부의 유해사이트 등에 대한 차단 강화는 사실 일회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이미 지난해에 유해사이트에 대한 차단이 기존 방식보다 강화됐고 저작권 위반 관련 만화 사이트 운영자 등이 검거 되기도 했다. 이미 이때 https의 SNI필드 식별을 통한 차단이 이미 예상됐다. 정부가 이런 맥락의 조치에 나선 것은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 등의 불법촬영물에 대한 반발과 이른바 ‘출사 모델’의 성폭력 피해 호소 등 인화성이 높은 사건들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음란물의 윤리를 굳이 따져보자면 국내법의 적용 범위 내에 있는 표현물을 즐기는 사람과 해외에서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음란물을 즐기는 사람, 불법촬영물 애호가에 대한 판단을 각각 달리할 수 있다. 문제는 실제 음란물이 소비되는 양상에 있어서는 이런 구분법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음란사이트’들에선 이런 다양한 성격의 음란물들이 모두 한 덩어리로 취급된다.

불법촬영물은 오늘날 ‘리벤지’란 수사를 붙인 이름을 얻었지만 과거에는 ‘국산야동’ 또는 ‘몰카’ 등으로 불려왔다. 구체적 피해자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영상물이 산지(産地)가 국내인 어떤 ‘상품’으로 사고된 것이다. 다른 성격의 음란물들은 등장 인물들의 외양에 따라 ‘서양’ 또는 ‘동양’으로 구분되었다. 음란물 애호가에게는 영상의 내용이나 맥락과 관계없이 크게 세 가지의 상품 선택지만이 있는 셈이다. 이 사실은 음란물을 둘러싼 이런 저런 논의가 거의 무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런 판국에 불법촬영물의 유포를 근절하라는 정치적 요구에 답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방법에 무엇이 있을까?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사이트 차단만이 능사가 아니니 불법촬영물을 가려내는 기술을 하루 빨리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 약 20억원의 예산을 들여 불법 음란동영상을 인공지능으로 걸러내는 기술 개발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정부의 이런 시도가 불법음란물을 인터넷 공간에서 모조리 제거하는데 성공할 것을 예상하는 전문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불법음란물을 식별하는 기술이 음란물을 생산하는 기술보다 발전이 늦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법촬영물은 피해자가 영원히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일단 음란사이트를 중심으로 유포되면 인터넷 공간에서 없애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디지털 장의사’를 자처하는 업체들 일부는 오히려 음란사이트들과 공모해 피해자를 이중으로 착취하기까지 했다. 이들 음란사이트의 상당수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고 수사망을 피하거나 수사를 지연시키기 위한 이런 저런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에 단속에 현실적으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음란사이트 운영자가 검거될 때는 이미 피해가 영구적인 것이 된 후다.

정부가 논란이 예고되는데도 불구하고 사이트 차단 방식을 확대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런 현실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냥 음란사이트 접속 자체를 차단하는 것 외에는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부터 인정하고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 이런 맥락을 제거한 채 표현의 자유나 성인의 즐길 권리를 말하는 것은 공허한 말장난으로 귀결될 뿐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인터넷 이용자 스스로가 음란물에 윤리적 접근을 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음란물도 ‘성인의 즐길 권리’ 수준에서 납득 가능한 형태와 내용인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이 정도의 노출 수준은 해외에서 허용된다 거나 촬영자가 스스로 동의를 했다거나 하는 ‘물건’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사람’의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음란물이 여성 일반을 대체한다는 세계관이 위력을 발휘하는 이상 음란물을 윤리적으로 비평할 수 있을 정도의 균형이 맞춰진 세상은 당분간 오지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오늘의 한 발짝 전진을 이뤄내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정부의 검열 시도에 반대한다는 시위에 나선 사람들이라면 “야동 때문이 아니다”라거나 “성인이 성인사이트를 이용하겠다는데…”라고 할 게 아니라 “음란물을 포기하더라도 검열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앞서 언급한 ‘진정성’도 증명이 되고 정부를 향한 요구에도 힘이 실린다. 이들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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