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전혁수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두 정상이 이달 말 베트남에서 만나 협상테이블에 앉는다. 지난해 1차 북미 정상회담 당시 이뤄진 한반도 평화체제, 북미관계 정상화 등 포괄적 합의가 구체화될지 관심이 모아지는 가운데 조선일보는 "비핵화 약속 없이 날짜부터 잡았다"며 반발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실무협상 전에 정상회담 날짜부터 잡아 미국이 북한에 끌려다녔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차 북미 정상회담 당시를 복기해 보면 조선일보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7일자 조선일보 사설.

7일자 조선일보는 <이번에도 '비핵화 약속'없이 날짜부터 발표된 미·북 회담> 사설에서 "북핵 폐기를 위한 미·북 정상회담이 작년 연말 이후 계속 미뤄져 오다가 마침내 열리게 됐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라면서도 "그러나 회담이 성사되는 모양새가 찜찜하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 개최를 예고하던 그 시간에 회담 의제를 조율하기 위한 미국의 실무 협상팀이 평양으로 향하고 있었다"며 "회담 일정이 먼저 정해진 다음 회담 준비가 시작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1차 회담 때도 그랬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앞둔 실무 접촉에서 북은 북핵 폐기 조치를 하나도 안 내놓고 버텼다"며 "날짜를 박아 정상회담 개최를 먼저 발표한 미국은 북 하자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도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에 지친 것 같다'면서 회담 낙관론을 폈다"며 "김정은이 경제난 타개를 위해 비핵화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한다는 뜻이다. 미국은 그 상응조치로 대북 제재 고삐를 풀어주는 거래를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로 들린다"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미·북 정상회담에 앞서 한·미 방위비 협상이 합의점을 찾았다는 소식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서도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 회담 때도 참모진과 사전 협의 없이 한·미 연합 훈련 중단을 불쑥 선언했었다. 이번에도 돌발 선언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고 썼다.

조선일보는 "지난 한 해 동안 북한은 말로만 '비핵화 의지'를 떠들었을 뿐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는 한 걸음도 떼지 않았다"며 "미 정보 수장들은 '북한 지도자들은 정권 생존을 위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고, 유엔 대북제재위원회는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시설을 여러 곳에 분산시키는 증거를 찾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고 썼다. 조선일보는 "미·북 실무회담과 정상회담은 북으로부터 핵 폐기라는 최종 목적지를 향한 실질적인 약속을 받아내야만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의 주장대로 한국 입장에서 북미 정상회담의 핵심은 핵 폐기라는 북한의 약속을 받아내는 것이다. 북한 비핵화는 한반도 평화정착을 넘어 강대국이 즐비한 동북아 정세의 안정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이번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그 결과물이 곧장 도출된다면 최선일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가 지난 1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북한에 끌려 다닌 것처럼 표현한 것은 다소 의아한 면이 있다. 조선일보는 이런 주장의 이유를 정상회담 날짜를 미리 못 박았은 데서 찾았다. 이번에도 실무협상에 앞서 날짜를 먼저 못 박았기 때문에 미국이 끌려다닐 우려가 있단 주장이다.

하지만 지난 1차 북미 정상회담 상황을 돌이켜보면 미국이 북한에 끌려 다녔다고 보기 어렵다.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지난해 5월 24일 북한은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폐기했다. 북한은 한국 언론을 비롯해 외신기자들을 초청해 이 장면을 생중계 했는데, 국제사회에 비핵화 의지를 드러내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풍계리 핵실험장이 폐기된 당일 트럼프 대통령은 6월 12일로 예정된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북한에 통보했다.

당시 북한은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을 향해 잇단 강성 발언을 내놓고 있었다. 지난해 5월 24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이 "미국이 우리의 선의를 모독하고 계속 불법무도하게 나오는 경우 나는 조미 수뇌회담을 재고려할 데 대한 문제를 최고지도부에 제기할 것"이라며 "미국이 지금까지 체험해보지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비극을 맛보게 할 수 있다"고 비난했다. 이 과정에서 마이크 펜스 당시 미국 부통령에게 '아둔한 얼뜨기'라고 비난했다.

지난해 5월 16일에는 최선희 부상이 한미 연합공중훈련 맥스선더를 비난하며 "조미 수뇌상봉의 운명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할 것"이라고 했고,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가용하려든다면 우리는 그러한 대화에 더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며 "다가오는 조미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통보하자, 북한의 태도가 바뀌었다. 김계관 부상은 김정은 위원장 위임으로 발표한 담화에서 "조선반도와 인류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하려는 우리의 목표와 의지에는 변함이 없으며 우리는 항상 대범하고 열린 마음으로 미국 측에 시간과 기회를 줄 용의가 있다"며 "만나서 첫술에 배가 부를리는 없겠지만 한가지씩이라도 단계별로 해결해 나간다면 지금보다 관계가 좋아지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기야 하겠는가 하는 것쯤은 미국도 깊이 숙고해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우리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시기 그 어느 대통령도 내리지 못한 용단을 내리고 수뇌상봉이라는 중대 사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데 대하여 의연 내심 높이 평가하여 왔다"며 "벌어진 불미스러운 사태는 역사적 뿌리가 깊은 조미 적대관계의 현 실태가 얼마나 엄중하며 관계개선을 위한 수뇌상봉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한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북한이 미국에 정상회담 개최 용의를 거듭 밝히며 사과를 건넨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미국이 북한에 끌려가는 회담의 분위기가 아니었단 얘기다.

▲2018년 5월 26일자 조선일보 사설.

당시 조선일보는 북미 정상회담 취소소식이 들려오자 불씨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북한의 담회문을 보고는 북한이 미국에 '꼬리를 내렸다'고 평가했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5월 26일 <꼬리 내린 北, '핵 사기극' 꿈꿨다면 여기 접으라> 사설에서 "미·북 정상회담에 일방적으로 취소됐음에도 북이 이런 식의 입장을 밝힌 것은 이례적"이라며 "전문가들은 북이 판문점 도끼 만행 이후 가장 저자세라고 한다.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궁지에 몰려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5월 26일자 조선일보 사설.

같은 날 <반드시 되살려야 할 美·北회담, 한·미 공조 이 상태론 안 돼> 사설에서는 "북핵 문제가 악화되면 우리 피해가 가장 크다"며 "어떻게든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되살려 북핵 빅딜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조선일보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가 취해지면 미국이 상응 조치로 대북제재 고삐를 풀어줄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연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외교는 현실이다. 북한이 경제난에 빠져 있으면서도 핵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김정은 정권의 체재 유지 목적이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실질적 대북제재 완화라는 상응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북한을 비핵화의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보수언론과 보수정치권은 한국의 현실을 '머리 위에 핵을 이고 산다'고 표현하곤 한다. 이 현실을 타개하려면 북한의 비핵화가 유일한 답이다. 결국 협상밖에 답이 없다. 이대로 핵을 머리 위에 이고 살 수는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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